[살며 사랑하며] 돌봄의 끝에 남는 것

입력 2021-12-24 04:05

지금도 어머니가 일기를 쓰시는지 모르겠다. 아주 옛날 가족이 함께 살던 시절 나는 어머니가 쓴 일기를 몰래 훔쳐 읽곤 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록도 읽은 적이 있다. 엄마는 스물네 살, 나는 돌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 무렵의 일이다. 내가 무척 울었었나보다. 자꾸 칭얼대는 나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어머니의 마음이, 내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던 아버지가 짜증을 내며 방을 나가버린 것에 대한 서운함과 야속함이 어머니 특유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아서 도무지 나라고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나라는 아기가 어리고 미숙했던 어머니를 이렇게 고달프게 했구나. 나는 가슴이 조금 미어졌다.

갑자기 이 기억이 난 것은 어제 본 전시 때문이다. 창원에 행사가 있어 내려갔다가 하루 묵게 되어 다음 날 오전에 찾아간 경남도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던 ‘돌봄 사회’라는 전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내 사적 활동으로 여겨지며 내내 평가 절하돼온 ‘돌봄’의 가치가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이 됐다는 것을 예술이라는 도구로 상기하는 프로젝트였다. 그중에서도 임윤경 작가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가 기억에 남았다. 미국(뉴욕)과 한국(서울, 경기, 보성)에서 노동했던 외국인 아이돌보미 분들이 10년 후 그들이 돌보던 아이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였다. ‘영상편지 대상은 특정인뿐만 아니라 0~3살 때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전시장의 벽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어머니는 어릴 적 나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착한 딸이었다고만 하신다. 언제나 엄마를 걱정하고 챙기고 틈만 나면 안마해주는 효녀였다고. 못되게 굴었던 증거를 이미 나는 여럿 알고 있는데도 어머니는 그런 건 다 잊었다는 듯이 좋았다고만 하신다. 모니터 속 여성들도 눈물을 흘리며 좋은 이야기만 했다. 아가야. 고마워. 아이 미스 유. 아이 러브 유.

요조 가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