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나그네로 살아가기

입력 2021-12-24 04:03

세상에는 두 유형의 영웅이 있다. 하나는 니므롯 유형이다. 창세기에는 그를 “첫 용사”라고 했고 역대기에서는 “첫 영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대담하고 날렵한 영웅이며 호걸이었다. 그는 바벨론의 시조로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거대한 성읍들을 세웠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벨탑으로 여겨지고 있다. 니므롯은 요새형 영웅으로서 한곳에 머무르는 정주형 인간의 표상이다. 요새란 아주 견고한 건축물로 안과 밖을 완전히 분리한다. 나에게 유익한 것은 들어오지만 무익한 것은 빗장을 걸어 절대로 들어오지 못한다.

또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 유형이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광야를 향해 떠났다. 수레에 천막을 싣고 가족들과 길게 늘어서서 정처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그를 영웅이라고 보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천막형 영웅으로서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유목형 인간의 표상이다. 천막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즉시 떠날 수 있도록 가볍고 간단하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하나님은 니므롯의 요새를 흩어버리고 폐허가 되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가 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요새를 버리고 나그네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 유형의 사람들이 모두 이방의 땅에서 장막에 거하며 외국인이요 나그네임을 증언했다고 말하고 있다(히 11:13).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그네처럼 살기를 거부한다. 안전한 성채를 짓고 나와 너를 분리하며 결코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자물쇠를 채웠지만 사실은 자신을 폐쇄하고 가두어 버린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물었던 가인은 한곳에 머물러 농사짓고 사는 정주형 인간의 시조다. 앨빈 토플러는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고, 전쟁을 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이뤄졌으며,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고통으로 인간을 괴롭히게 됐다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평가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요새를 박차고 나왔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출발이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을 희망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듯이 모세는 파라오를 떠났다. 바울은 유대교를 떠났고 루터는 로마교회를 떠났으며, 프랜시스는 풍요를 떠났고 콜럼버스는 유럽을 떠났다. 그런 떠남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그네의 삶이란 어딘가에 도착하는 순간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삶이다.

유영모 선생은 ‘나그네’란 말을 “나와 너 사이에 그가 계신다”로 풀어 설명한 바 있다. 우리가 나그네가 돼도 불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와 함께하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노아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아브라함에게는 롯이 있었으며 모세에게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고 예수님께는 열두 제자가 있었다.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영원히 계시느리라”(삼상 20:23)는 다윗과 요나단의 결속은 이스라엘 건국을 가능하게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쟁이 난무한다. 두려움과 혐오가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나그네형 영웅을 뽑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탄의 핵심 메시지는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유장춘(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