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 배우자의 과거 이력이 화제다. 하나하나 기억하기 힘들 정도의 허위 경력들이 매일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막상 당사자는 기자의 질문에 “당신도 털면 안 나올 것 같냐”고 반문했다던데, 이 정도 분량의 위조라면 한두 사람을 터는 걸로는 어렵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화차’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다. 신용카드 사용자의 무분별한 증가와 더불어 사회 문제가 됐던 일본 도요타 상사 사기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화차’에는 이름을 고치고 외모를 바꾸고 이력을 통째로 세탁한 ‘쇼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1992년 발표한 이 소설이 한국에 소개된 건 2000년이었는데 어쩌면 변영주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 속 ‘차경선’을 떠올리는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배우로서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쇼코 역을 맡은 김민희씨의 열연은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화차’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마주한 이 소설은 당시만 해도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에서 예상하기 힘든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비범한 재능을 지닌 탐정이 ‘마지막에 극적으로 범인을 밝혀낸다’는 패턴으로 진행되던 추리소설들과 달리, 틀에 박힌 전개가 없고 범인이 나쁘다는 깔끔한 해결이 없으며 반전을 강요하는 윽박지름이 없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아니,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다. 범인을 추적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를 추적해 가는 사회파 추리 장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로 미야베 미유키 작가와 연을 맺어 지금껏 작품을 출간해 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화차’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얼마나 더 팔렸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북스피어가 창업하기 전에 이미 한국어판의 판권이 팔린 상태여서 내가 계약하지 못했다. 하지만 훌륭한 소설이니까 좀 더 알려지기를 바라며, 한 가지 정도는 지적해 두고 싶다.
소설에서 쇼코의 행각이 탄로 나게 된 계기는 방심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괜찮겠지’ 하고 섣불리 행동하는 바람에 과거가 폭로돼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쇼코 남편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추적하던 전직 형사는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대체 왜 쇼코는 이름을 고치고 외모를 바꾸고 이력을 통째로 세탁했을까. 주택 대출을 갚지 못해 대부업체에서 돈을 끌어다 쓴 쇼코의 부모님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업자들은 폭력배를 동원해 한밤중에도 창문을 두드리며 위협했다. 갚지 않으면 딸을 유흥업소에 보내겠다면서. 급기야 노이로제에 걸린 어머니가 동반 자살을 시도할 당시 쇼코는 열일곱 살이었다. 결국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아버지는 어디론가 숨었고 어머니는 강제로 매춘 조직에서 일하다가 각성제에 중독돼 돌아가셨다. 그 사이에도 꼬박꼬박 이자가 붙어 손쓸 도리가 없는 금액으로 불어난 빚은 고스란히 쇼코의 몫이었다. 법도 지켜주지 못했다.
쇼코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위장 언저리가 서서히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한 평온한 삶은 꿈꿀 수조차 없었던 쇼코의 목표는 ‘쫓겨 다니는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다, 많은 돈을 벌어서 더욱 호화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까지 바랐다.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지옥으로 실어나른다는 불수레(火車)에 쇼코가 태워지지 않기를 하고 말이다.
과연 쇼코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음, 어떻게 됐더라. 벌써 10년도 전에 읽은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조만간 한 번 더 읽어야겠다. 그리하여 다시 쇼코와 만나면, 난데없이 남의 나라 대선 국면에 호출돼 말도 안 되는 인물과 비교당하게 했다는 점에 대해 마음속으로나마 사과하고 싶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