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 공포에 직면한 인간을 그린 작품이다.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TV쇼 부분 글로벌 1위에 오르며 흥행에 성공해 원작인 웹툰에 관한 관심도 뜨겁다.
웹툰 ‘지옥’의 최규석 작가는 이전부터 ‘네임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작품 중 노동 문제를 다룬 ‘송곳’(2013년)도 2015년 JT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됐다. 경남 창원의 작업실에서 창작 중인 그를 지난 21일 화상으로 만났다.
최 작가는 “‘지옥’이 작가로서 터닝 포인트(전환점)가 될 것 같다”며 “사람들이 ‘아, 최규석이 맨날 구질구질한 현실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구나’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송곳’뿐만 아니라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2004년) ‘습지생태보고서’(2005년) ‘100℃’(2009년) 등에서도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뤘다.
웹툰 ‘지옥’은 2019년 8월부터 1년간 연재됐다. 연 감독이 웹툰 시나리오의 초고를 거의 다 짰지만 세세한 부분은 둘이 함께 만들어 갔다. 20년 넘게 친구로 지낸 관계여서 가능했다. 최 작가는 “연 감독은 특징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치고 나가는 스타일이고 나는 인물의 내적인 감정, 필연성을 중요시해서 의견 차이도 있었다”고 했다.
최 작가는 시나리오상의 사건뿐만 아니라 각 인물의 세밀한 감정선까지 만화로 표현하려 했다. 사이비종교집단 새진리회의 초대 의장인 정진수가 죽음을 앞두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20년간 죽음이란 문제에 몰두해온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어떠한지도 담아내려 했다.
최 작가는 소품 하나하나에도 서사를 부여했다. 새진리회의 광신도 집단인 화살촉을 선동하는 유튜버 이동욱은 웹툰에서 인디언 추장 탈을 쓰고 인터넷 방송을 한다. 화살촉이 온라인상에 형성된 일종의 ‘종교적 부족’이란 의미를 담은 것이다. 원시부족의 느낌과 더불어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동욱의 열망도 표현했다.
‘지옥’의 흥행은 다소 예상 밖이었다. 원작 웹툰을 그린 최 작가 본인도 ‘지옥’이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크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고지받고 광신도들이 사회 질서를 장악하는 등의 설정이 너무 과격해 대중성이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는 “(드라마) 메이킹 필름의 현장편집본을 보면서도 과연 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박정자 역을 맡은 김신록 배우의 분량이 나오자마자 아주 좋은 작품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고,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최 작가는 ‘지옥’에서 이전 작품과 달리 지옥 저승사자 천사 등 비현실적인 부분을 다뤄야 했다. 그는 “지옥행을 고지받은 박정자가 ‘저 지옥에 가요’라고 털어놓고,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려면 이전부터 (이야기를) 잘 깔아야 했다”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해 중요한 대사는 몇 달 전부터 준비했다. 정진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대사가 그랬다. 이야기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대사였기에 무척 중요한 지점이었다. 새진리회를 묘사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사이비 종교를 설파하는 이들의 영상도 많이 참고했다.
잘 그리지 않던 액션 장면을 작업하면서 평소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지옥의 사자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 화살촉 일당이 새진리회 교리에 반대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장면 등에선 인물의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는 “보통 웹툰 작업을 할 때 1주는 시나리오, 1주는 콘티를 짜고 2주 동안 4회 분량의 그림을 그린다”면서 “‘지옥’은 시나리오가 완성돼 있으니 (작업기간이) 1주 단축될 줄 알았는데 그림을 그리는 기간이 3주로 늘어나더라”며 웃었다. 최 작가는 “만화에 특수효과를 많이 쓰지 않아 속도감을 표현하기 어려웠고, 사자들의 등장과 퇴장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도 고민됐다”고 했다.
웹툰과 드라마는 같은 듯 조금씩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박정자가 부활하는 장면이 웹툰에는 없다는 점이다. 최 작가는 “드라마 시즌2가 가능한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화도 똑같이 가면 너무 장기 프로젝트가 된다고 생각했다”며 “만화는 여기서 일단락하고 다음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확정된 건 없었지만 시즌2 구상은 계속 해왔다. 올봄부터 연 감독과 함께 시즌2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당초 계획대로면 시즌2 웹툰은 드라마 개봉 시점에 맞춰서 연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다듬느라 미뤄져 웹툰 시즌2는 이르면 내년 하반기쯤 나온다.
1998년 데뷔한 최 작가가 만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다.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는 만화가 중 한 명이지만 만화에 너무 매몰되는 삶은 경계한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만화가인 아는 형의 화실에 자주 놀러 갔다. 그 형은 쉬는 날이 1년에 하루도 없었고 하루 3~4시간만 잤다”며 “작가는 독자보다 많은 걸 읽어야 하고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저 형처럼 뽑아내기만 하면 창작력이 유지될 수 있을까 싶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 ‘2년에 한 권 정도 책을 내고 근근이 먹고사는 널널한 만화가’로 살았지만, ‘송곳’ 이후 달라졌다. 그는 “긴 이야기를 처음 연재하면서 ‘이것만 하고 옛날로 돌아가야지’ 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안 되고 있다”며 웃었다.
최 작가는 사람의 생각을 뒤흔드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는 “윤리학의 사고실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며 “사람들의 생각에 혼란을 주고 싶다. 그게 이야기의 가장 큰 재미”라고 했다. 웹툰은 누군가의 삶을 가상체험해보는 것인데 ‘내 삶과 별 차이가 없네’라는 생각이 들게 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웹툰 주인공과 함께 독자도 ‘여기서 어떻게 하지’ 고민하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최 작가는 어릴 때부터 윤리적 질문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 게 옳은가’하는 질문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곤 했다”며 “원래 지키고자 했던 것과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생기는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게 흥미 있다”고 전했다.
그가 만화가가 되는 데 영향을 준 작가는 청춘 만화 ‘터치’로 유명한 일본의 아다치 미츠루였다. 아다치 작가의 만화를 중2 때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만화도 문학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한국 작가 중에선 ‘둘리’의 김수정 작가, ‘간판스타’의 이희재 작가의 영향을 받았다. 김 작가의 연재작이 보여주는 ‘대사의 맛’과 이 작가의 리얼리즘이 인상 깊었다.
‘지옥’ 시즌2가 나올 때까진 시간 여유가 있지만 최 작가는 바쁘다. 연 감독과 새로운 작품도 기획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문명의 태동기를 다룬 작품은 꼭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데뷔작도 석기시대가 배경인 단편이었다. 최 작가는 “청동기 이전, 농업이 시작되는 시점의 부족사회를 그려보고 싶다”며 “고고학과 인류학 책을 틈나는 대로 보며 관련 전시를 보러 가고 석기도 직접 만들어본다”고 말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