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A양은 최근 부모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털어놨다. “‘슬러시 많이 줄게’ 하면서 가슴을 만졌어요.” “좁은 통로에서 몸에 손을 댔어요.” 부모는 두 귀를 의심했다. 딸아이가 몸에 손을 댄 자로 지목한 이는 학교 앞 문구점 주인이었다. 다른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 역시 이 문구점 주인에게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문구점 CCTV와 피해자 진술 등을 토대로 수사를 벌여 이 50대 남성을 지난달 3일 아동 성추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지난 6월부터 경찰 수사가 시작된 9월까지 최소 3개월 이상 교묘한 성추행이 문구점 안팎에서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다.
초등학생 B양은 지난달 13일 서울 동작구의 한 주택가에서 마주친 60대 남성으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이 남성은 B양에게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갑자기 추행을 시도하다가 행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추행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7월 서울 은평구의 한 공원을 산책하던 10대 후반의 C양에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C양의 나이와 전화번호 등을 물어보더니 “이건 지나가는 말로 하는 거야. ‘알바’ 뛸 수 있어?”라고 말을 건넸다. 성매매를 제안한 것이다. C양이 거부하자 그는 악수를 청했고, 피해자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6단독(부장판사 김성대)은 지난 4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이 남성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아동·청소년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성범죄자들은 이처럼 음험하게 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호감으로 위장한 추행으로, 어린 피해자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다. 통상 강간 등 성범죄는 아동일지라도 대부분 피해 사실을 가족이나 지인에게 털어놓고, 결국 신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머리 쓰다듬기나 손등 뽀뽀, 은근슬쩍 만지기 같은 신체 접촉은 추행인지 아닌지 바로 판단하기 쉽지 않다. 앞선 A양 사건 피의자도 가해자가 이 같은 맹점을 악용해 추행을 반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범죄자들은 피해 아동과 부모의 심리를 악용하기도 한다. 경찰 등에 따르면 성추행 피해자와 부모는 신고까지 여러 단계의 심리적 고민 과정을 거친다. 피해를 본 아동의 판단이 첫 번째다. 한두 번의 신체 접촉은 의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가해자의 행동을 웃어른의 애정 표현으로 착각할 수 있다. 경찰 관계자는 “아이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도 괜히 부모에게 혼날까 봐 얘기를 꺼내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며 “추행이 상습적으로 이뤄지는 경우엔 또래끼리 얘기를 나누며 용기를 얻고 부모에게 털어놓기도 하지만, 여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한국과 같이 어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국가에선 성적 의도가 있다고 느껴도 아동·청소년들이 직접 항의할 수 없는 상황이 많다”며 “범죄자들이 이런 심리를 이용한다”고 분석했다.
아동이 ‘피해를 봤다’고 말한 뒤에는 보호자의 판단이 두 번째 과정이 된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명백한 범행으로 보이지 않으면 선뜻 신고하기가 어렵다. CCTV 영상 등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피해자인 아이를 먼저 조심시키려고 하고, 문제가 된 현장을 피하려는 경향이 크다고 경찰은 설명한다.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아이를 다시 같은 곳에서 가해자와 마주치게 할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어렵게 마음 먹고 신고해도 부모와 아이 모두 경찰 조사를 받는 것 자체가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경찰 조사가 길어지면서 가해자의 해코지를 우려하는 경우도 있다. 신고 자체가 긁어 부스럼이 될 것이라는 인식도 작동할 수 있다. A양 사건에서도 피해 학생들의 부모 대다수가 아이에게 피해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다며 조사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아동·청소년 성범죄는 ‘암수화’될 가능성이 크다. 암수범죄란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용의자 신상이 특정되지 않아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말한다. 피해자와 보호자의 판단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며 결국 수사기관 신고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묻혀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해자가 가족이나 지인일 경우에는 신고를 회피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한다. 성범죄 신고율 자체도 10%대로 추정될 만큼 낮은데 아동 상대 성범죄의 경우엔 더 암수화되기 쉬운 셈이다. 암수화는 성범죄 재범률이 높아지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암수범죄를 줄여나가기 위해 예방적 측면의 대응이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승 연구위원은 “범행에 취약한 아동·청소년에게 칭찬과 선의를 가장한 행동으로 자신의 성적 의도를 감춘다는 점에서 죄질이 나쁘다”며 “학교에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이런 범행의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부모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미 법무법인 숭인 변호사도 “교묘하게 경계에 선 모든 행위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이 먼저”라면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전 연령대로 일반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홍창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사무국장은 “어린 학생들에게만 국한하거나, 한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애주기별로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