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싱어게인’이란 방송을 봤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력은 갖췄지만 빛을 보지 못한 무명의 가수들이 나와 경쟁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국민가수 이선희 심사위원이 심사평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목소리에는 첫째 무심함, 둘째 개성, 셋째 쓸쓸함이 있습니다.” 그 심사평을 듣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에 세 가지 단어가 들어왔다.
무심함이라는 것은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백색 소음이 있는가. 서로를 비난하고 물고 뜯는 파괴적인 소리도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무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급변하는 상황과 환경에 동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격앙되지도 말고 자기 길을 걸으며 진정한 자기 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무심하다고 해서 그 노래에 개성을 없애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떻게 가수가 로봇이나 AI처럼 획일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진정한 가수라면 음표에 없는 음도 자기만의 개성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 가수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쓰러진 고목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심함과 개성을 갖췄다면 마지막으로 그 노래 속에 쓸쓸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 정호승 시인도 사람은 외로워야 자기만의 길을 떠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국민가수다운 심사평이었다. 그의 말을 나의 신앙생활과 영적인 삶에 대입해 봤다. 나는 일찍이 한국교회 생태계와 공적 사역에 눈을 떴다. 그때는 총회장이나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한국교회를 향한 순애보라 여겼고 하나님이 주신 거부할 수 없는 사명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때는 그렇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표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회장이 되고 연합기관 대표회장으로 일하다 보니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됐다. 어쩌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그 모든 비난과 공격을 일일이 다 직면했다면 엄청난 트라우마를 입게 됐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나에게도 무심함이 있었다. 그런 비난과 공격에 감정이 동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일이 대응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의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도전을 했고 나의 온 개성을 발휘했다. 자리만 차고 있는 대표가 아니라 실무형 대표회장으로 일했다.
내가 얼굴마담형 대표회장 역할만 하고 실무자들이 더 눈에 띄었더라면 그 많은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무형 대표회장으로 뛸 뿐만 아니라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하이 콘셉트’를 가지고 ‘하이 터치’를 하려고 했다. 이런 지도자의 길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앞서 교단과 교계를 섬겼던 총회장이나 연합기관 대표회장들의 쓸쓸함, 고독함이 느껴지곤 했다.
지도자가 쓸쓸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지도자가 감정에 치우쳐 한순간 잘못 판단하면 수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게 되고 상황이 미묘하게 꼬이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한다. 그리고 산행을 하면서 방랑자가 되어 외로운 선율을 찾아 나선다. 그럴 때면 예외 없이 아름다운 삶의 선율, 행복한 정서의 선율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선율의 스피릿 안에서 바른 판단을 하게 되고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는 공익적 결과를 얻는 것을 경험했다. 그대에게는 얼마나 무심함이 있는가. 개성도 발휘하는가. 그러면서도 쓸쓸함을 경험하고 있는가. 그러한 경험이 그대를 평범한 사람이 아닌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