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조서 없는 재판… 조사자 증언·플리바기닝이 대안 될까?

입력 2021-12-22 04:04
사진=권현구 기자

“현실로 한번 부딪혀 보고, 어떤 문제가 생길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내년 1월 1일부터 검찰 피의자신문조서(피신)의 증거능력이 제한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시행되는데, ‘적용 기준이 애매해 혼선이 우려된다’는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내년부터 검찰이 작성한 피신은 피고인이 부인할 경우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 피신은 수사기관과 피의자의 문답을 기록한 서류다. 국회는 지난 9일 법 개정안 적용 기준을 ‘내년 1월 1일 이후 기소된 사건’으로 정했다. 시행이 코앞인데 세부 지침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였다. 이로써 연내 작성된 피신이라도 내년에 기소되면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이 주요 사건들을 올해 안에 재판에 넘기기 위한 속도전에 돌입한 이유다.

그렇지만 여전히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령 같은 사건 공범들도 기소 시점에 따라 검사 피신 증거능력이 있고 없는 상황으로 나뉠 수 있다. 동일한 피고인에 대해서도 올해와 내년에 각각 기소된 사건을 병합해 심리한다면 검사 작성 피신의 증거능력을 다르게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다. 김 의원은 “굉장히 불균형적인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검사 작성 피신의 증거능력 배제에 따른 실무상 혼란을 다루는 역할은 결국 법원의 몫이 될 예정이다. 법조계는 검사와 피고인이 모두 법정에서의 증거조사에 집중해 공판중심주의가 활성화될 것이란 개정 취지가 실현될지 주목한다. 피의자를 수사한 경찰관 등이 직접 법정에서 서는 조사자증언 제도와 피고인신문이 더욱 강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서울고법 한 부장판사는 “그간의 재판이 검사가 수집한 증거를 법정에서 꺼내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재판에서 증거를 직접 발견하는 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건 관련자 다수가 법정에 직접 나서게 되는 상황이 ‘재판 장기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높다. 법원이 사실상 수사기관 역할까지 수행하게 될 것인데, 개별 재판부가 이를 감당할 여건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매달 100건 가까운 신건(新件)에 허덕이는 형사 단독재판부에선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3년 가까이 1심 재판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을 거론한다. 해당 사건은 매주 재판을 열어도 검찰과 양 전 대법원장 측이 신청한 100여명의 증인신문을 감당하지 못해 장기화되고 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조사자증언에 대해서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범선윤 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는 지난 10월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실제 경찰관이 증인으로 출석한 경우에도 피고인 진술 내용이나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일부 법률가들은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도) 도입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피신 관행이 없는 미국 등은 피의자가 범죄를 인정하는 대가로 형량을 줄여주는 플리바기닝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 법은 아직 플리바기닝을 인정하지 않지만, 검찰이 이를 암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시선은 끊이지 않았다.

모성준 대전고법 판사는 지난 10월 학술대회에서 “증언의 대가로 면책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 공범이 얽힌 사건에선 대거 증언거부권 행사로 진실 파악이 곤란할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플리바기닝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법대 앞에서 재판부와 검사, 변호인이 민사 재판에서 조정하듯이 플리바기닝을 하는 상황이 장기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상훈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검사와 피의자의 협상에 따른 부작용은 미국에서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며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 제한이 수사·재판에 미칠 효과는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검찰과 법원의 공통된 견해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 직접 수사가 줄면서 검사 피신 비중은 더 이상 크지 않다는 평가도 많다. 검찰 수사 실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한 검찰 간부는 “지금 시스템 하에서는 검사들이 조서를 받아서 (강압 수사 등) 불필요한 논쟁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검찰 내부에선 소송 경제적 측면에서 여러 문제점이 이어질 경우 입법적 보완이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일부 법조인들은 방대한 사건 기록에 파묻힌 법원과 빠른 결론을 원하는 소송 당사자 사이에서 사건 얼개가 잘 정리된 조서가 형사사법제도를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했다고 본다. 최병천 전남대 로스쿨 교수는 “피의자 조사 과정을 녹화·녹음한 자료에는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건 처리 지연 등의 문제가 심화되면 법관 임용 논의에 새로운 국면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판사 임용 자격 조건을 ‘법조 경력 10년’으로 높여 법조일원화를 강화하는 시점은 당초 2026년에서 2029년으로 3년 유예됐다. 법조일원화 제도는 다양한 경력을 지닌 법조인을 판사로 뽑아 사법부 폐쇄성을 없애겠다는 목적으로 2013년 도입됐다. 하지만 법관 수급 장애와 재판 장기화 등 현실적 상황에 맞부딪힌 상태다. 한상훈 교수는 “내년 이후 재판 지연, 업무 부담 등의 상황에 따라 법관 증원 논의가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별취재팀 양민철 임주언 조민아 구승은 박성영 기자 listen@kmib.co.kr

[검찰 조서 증거능력 사라진다]
▶①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