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삶을 바꾸는 다정한 한 줄

입력 2021-12-22 04:04

한 해를 끝내고, 새해를 시작할 때다. 집과 사무실 곳곳에 놓인 달력을 바꾸고, 새 수첩을 꺼내 첫 장을 연다. 텅 빈 공간이 생각을 일으키고, 눈부신 백지가 기대를 부풀린다. ‘무얼 적어야 할까?’ 누구나 비슷하듯, 새해 첫 문장을 쓰는 마음은 언제나 콩닥거린다. 정성스레 골라 쓴 한 줄이 축복처럼 한 해 내내 지켜줄 것 같고, 부적처럼 닥쳐올 삿된 일을 막아줄 것 같다. 돌이켜서 기억의 갈피를 넘기면 때로는 쓰라리고, 때로는 무람하고, 때로는 섬뜩하고, 때로는 뿌듯한 일들이 떠오른다. 잦아들지 않는 재난이 인생 쓰나미로 바뀌지 않도록 열심히 살았구나 싶다. 바라면서 상상의 책장을 열어보면 때로는 두근대고, 때로는 염려스럽고, 때로는 즐거워지고, 때로는 무서워진다. 계획해서 새롭게 시작할 일과 불시에 닥쳐올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돌아보면서 정성스레 자신을 성찰하고 내다보면서 희망을 쌓아 올리는 것은 우리 삶에 중요하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정성을 들일 때만 인생은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어제처럼 살지 않고, 올해처럼 다가올 해를 살지 않으려면, 정성을 다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성의 정(精)은 ‘고르다’, 성(誠)은 ‘진실하다’의 뜻이다. 어지러운 것은 덜어내고, 어리석은 것은 무찌르며, 사악한 것은 솎아내어 자신을 온전히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거룩한 시간 없이 인간은 삶을 새롭게 할 수 없다.

물론, 돌아본다고 지난날을 어쩔 순 없다. 시간의 화살표는 한쪽에만 머리가 있으므로, 과거에 어떤 나쁜 일이 있었더라도 그걸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돌아봄이 부질없지는 않다. 기억은 과거의 일들을 오늘의 일로 만든다. 우리는 좋은 추억을 정련해서 기쁨을 지속하고 행복을 이어가며 나쁜 기억을 처리해서 불안을 달래고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고, 도무지 견디지 못할 일들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이렇게 돌이키는 사람은 자신을 구원한다. 낡은 자아를 고쳐 씀으로써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앞날은 열려 있다. 가능성의 햇살과 함께 불확실성의 먹구름에 가려져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다가올 시간에 장밋빛 소망을 불어넣는다. 아직 오지 않았기에 좋은 일들만 고르고, 기쁜 날들을 마음껏 선택한다. 당연히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망은 앞으로 올 일들은 지금 여기의 일로 변화시킨다. 달콤한 미래를 당겨서 미리 살아본 사람은 흔히 그 일에 적합하도록 자기 삶의 세부를 조정하기로 마음먹는다. 지금껏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 눈길을 주면서 오늘의 삶을 조금이나마 바꾸어 보기로 한다. 따라서 올해의 한 줄은 대부분 결심과 다짐의 한 줄이기도 하다.

‘단어의 집’에서 안희연 시인은 매년 12월 31일에만 펼치는 작은 노트가 있다고 고백한다. 겉면에는 ‘NOT TOO LATE’, 즉 ‘너무 늦지 않게’라는 뜻의 글귀를 적어 두었다. 한 해 한 차례, 시인은 이 노트를 열고 새해 소망을 적는다.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딱 한 줄일 것.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일 것. 진심일 것.” 노트는 시인이 모아들인 ‘까다로운 작은 소망’들이 담긴 저장소가 된다. ‘알록달록해지기, 사랑스럽게 거절하기,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될게’ 등 다정한 소망들이 그동안 모였다. 시인은 독특한 새해맞이 의례를 인생에 예의를 다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진부하고 아주 가끔 놀라워지는 삶”을 조바꿈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을 좇아서 한 해의 문턱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 더 나은 삶을 떠올리고, 수많은 소망을 몇 가지 단어로 집약함으로써 스스로 삶을 돌볼 수 있다. 새해 첫 새벽, 나는 그 한 줄을 쓰기 위해 새 수첩을 열고 백지의 공포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 함께 당신이 쓰게 될, 삶을 바꾸는 다정한 한 줄이 궁금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