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가족인가 정치인가

입력 2021-12-20 04:08

영국 공영방송 BBC가 최근 주목한 서구권 가족 간 의절의 주요 원인은 이념이었다(국민일보 12월 11일자 1·2면). 정치 현안부터 각종 인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로 가족끼리 싸우고 결국 관계를 끊기도 하는 사례가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같은 영어권 사회에서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풍경,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이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미국 심리학자 조슈아 콜먼 박사는 지난 5월 행동과학 분야 온라인 전문지 ‘행동과학자(Behavioral Scientist)’에 기고한 글에서 “정치적 차이가 (가족 간에) 점점 더 멀어지는 원인으로 보인다”며 “피는 더 이상 물보다 진하지 않다. 특히 물이 정치적 성향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한 2016년 대선을,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기점으로 이런 경향이 한층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정치판 대결이 치열할수록 개인 간의 정치 얘기도 극단으로 향한다. 이상신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장은 2013년 한국정당학회보 게재 논문에서 “결과적으로 선거와 토론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아니라 불신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가족연구센터가 가족과 단절된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 ‘스탠드얼론(Stand Alone)’과 함께 2015년 진행한 조사에서 ‘성격과 가치관 충돌’은 성인 자녀가 부모와 관계를 끊게 된 주요 이유에 들었다. ‘정서적 학대’ ‘가족 역할과 관계에 대한 기대 불일치’에 이은 세 번째 이유였다. 형제 관계가 파탄에 이른 이유로는 ‘가족 역할과 관계에 대한 기대 불일치’에 못지않은 응답률로 ‘성격과 가치관 충돌’이 2위를 차지했다.

미국 공화당 애덤 킨징어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은 올해 1월 의회 폭동 후 트럼프 탄핵에 찬성했다가 집안에서 탄핵을 당했다. 가족 11명은 2장 분량 자필 편지에서 “가문의 이름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며 킨징어를 후레자식 취급했다. 그들은 첫 문장의 ‘실망(disappointment)’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세 번이나 그었다. 킨징어 가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불화와 결별은 대체로 상처를 남긴다. 글렌 게허 뉴욕주립대 심리학과 교수가 미국 성인 315명을 대상으로 한 2019년 연구에서 의절한 관계가 많은 사람일수록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괴로워했다. 칼 앤드루 필레머 미국 코넬대 인간개발학과 교수는 가족 간 불화를 만성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결론지었다.

보통의 경우 정치 얘기가 절충을 이루고 끝나는 경우는 없다. 실제 정치판에는 그렇게 합리적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를 우리 이상대로 빚을 수 있다면 애초 지금 같은 인물들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콜먼 박사는 “오늘날 우리는 당파가 부추긴 폭력에서부터 행정의 정체,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에 관한 교착에 이르기까지 분열의 결과에 시달리고 있다”며 40년 가족치료사 경험상 존중과 헌신 없는 논쟁에서는 ‘좋은 것’이 나오지 않더라고 전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믿는 것은 그들을 개탄스럽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라며 “그것(상대를 부정하는 것)이 가족을 해치는 레시피(비법)이자 나라를 망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꼬집는다.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로 가족끼리 더욱 언성을 높이는 때가 왔다. 어느 집에서도 그 끝이 만족스러웠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왜 우리는 본 적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정치인들을 대신 옹호하느라 가족과 얼굴을 붉혀야 하는가. 그 정파, 그 정치인들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인가. 나는 없다고 본다.

강창욱 국제부 차장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