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스크린골프, 33년전 미디어아트에 이미 구현됐다

입력 2021-12-19 21:57
광주시립미술관은 독일 ZKM 소장품을 통해 미디어 아트의 흐름을 보여주는 ‘미래의 역사 쓰기: ZKM 베스트 컬렉션’전을 한다. 관람객이 인터랙티브 아트의 효시 격으로 제프리 쇼가 1988년 선보인 ‘읽을 수 있는 도시’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작품을 즐기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대형 스크린에 글자로 만든 도시 이미지가 있다. 그 앞에 설치된 실내용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으니 영상 속 ‘글자 빌딩’들이 페달 속도에 따라, 핸들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쑥쑥 나가며 펼쳐진다. 이 작품은 독일의 미디어아트 작가 제프리 쇼가 1988년 선보인 ‘읽을 수 있는 도시’다.

관객의 동작에 영상 속 이미지가 상호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기술을 이용한 것인데, 21세기인 지금 대중화된 스크린 골프의 작동 원리와 흡사하다. 기술의 진화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줬지만 동시에 예술이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최근 개막한 ‘미래의 역사 쓰기: ZKM 베스트 컬렉션’전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시로 보여준다. 독일 ZKM 소장품의 한국 첫 나들이라는 점에서 미술계의 관심이 뜨겁다. 카를스루에에 있는 ZKM은 학교, 연구소, 전시장을 함께 갖춘 세계적인 미디어예술센터로 고전예술을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라는 사명을 띠고 1989년 국립기관으로 설립됐다. 이번 전시는 제프리 쇼의 작품이 보여주듯 시진과 비디오를 거쳐 NFT(대체불가능토큰)에 이르기까지 매체의 진화가 예술과 삶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반인은 물론 영감이 필요한 기업가들도 호남선을 타고 가볼 만하다.

유고슬라비아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미국의 브루스 나우만과 게리 힐, 빌 비올라, 체코의 하룬 파로키, 한국의 백남준…. 국적을 초월해 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 64명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긴다. 전시는 이들의 주요 작품 95점으로 구성됐다. 전승보 광주시립미술관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미디어아트의 역사 전체를 보여줄 수 있도록 역사적인 대표작으로 구성해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우디 바술카와 스타이나의 ‘재림의 빛’(1974).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전시에 3층 전관이 사용돼 볼거리가 풍성하다. 1층은 ‘프롤로그’ 섹션으로 우디 바술카와 스타이나의 ‘재림의 빛’(1974) 등 예술에 새 기술을 이용한 선구자들의 작품으로 꾸몄다. 본론 격인 2층의 ‘미디어, 신체, 초상’ 섹션에서는 초기 비디오아트 작품부터 현대의 체험형 인터랙티브 작품까지 다양하게 전시함으로써 인간이 몸을 대하는 관념과 관습의 변천을 살펴본다. 독일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인 토마스 루프가 증명사진처럼 무표정하게 찍은 ‘안나 기스의 초상’(1989)은 사진이 예술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리 힐의 ‘마우스피스’(1978)는 입술 형태의 이미지 안에 실제 입술 모양 영상이 왔다 갔다 하면서 회화와 영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폴란드 실험영화 감독인 즈비뉴 립친스키의 ‘탱고’(1980)는 각각의 남녀 얼굴이 갑자기 DNA 사슬처럼 변하더니 순식간에 남녀가 빙빙 돌며 춤추는 장면으로 바뀐다. 토니 오슬러의 ‘여보세요?헬로?’(1996)는 쿠션 모양에 사람 이미지가 투사돼 입이 움직이며 말까지 한다. 기술의 진화는 이렇듯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예술의 영토를 비옥하게 한다. 회회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듯이 비디오아트 역시 구상에서 추상으로 흐름을 보여 흥미롭다.

게리 힐의 ‘마우스피스’(1978).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3층 ‘미디어와 풍경’ 섹션은 가장 다이내믹한 공간으로 체험형 작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컴퓨터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으로 꼽히는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도 여기에 있다. ‘TV 그네’(디커 키슬링, 1983)는 말 그대로 그네에 매달린 TV인데, 관람객이 TV를 밀면 실제 화면 속 그네도 움직여 신기하다.

손을 갖다 대면 화면 속 비눗방울이 손을 피하듯 도망가는 작품인 볼프강 뮌하우, 키요시 후루카와의 작품 ‘버블스’(2000)는 “ZKM을 찾는 관객들이 제프리 쇼의 작품과 함께 가장 좋아한다”고 ZKM의 테크니션 크리스티앙 롤케는 말했다.

발터 지에르스의 ‘더 하우스’(1990)는 건축과 빛, 소리가 결합한 미디어아트 작품인데, 아파트를 형상화한 그리드 구조물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꺼진다. 완전히 불 꺼진 어느 집 거실 창에서 웬 남자가 코를 드르릉거리는 소리가 나와 웃음을 유발한다.

토니 오슬러의 ‘여보세요? 헬로?’(1996).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최신 매체인 NFT 작품도 나왔다. NFT는 디지털 공간에서만 생산되고 유통되는 작품이 불법 복제되지 않도록 전자서명기술(블록체인)을 이용해 소유권을 부여하는 걸 말한다. 한국에서는 NFT 거품이 형성되며 수채화를 NFT화하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ZKM의 소장품은 NFT 작품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안목을 길러준다.

광주는 2014년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에 선정됐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이후 미디어아트 기획전을 해마다 해왔고 그 완결판으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ZKM과 2019년 상호교류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2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광주시는 미디어아트 전용 전시관인 광주미디어아트센터(AMT·가칭)를 내년 3월 개관한다. 전 관장은 “개관전으로는 동시대 미디어 아트를 대거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4월 3일까지.

광주=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