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였다. 한나라당이 지역주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거제도 개편에 동의한다면 총리를 포함한 장관 임명권을 한나라당에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보낸 ‘지역구도 극복과 대연정 제안’이라는 제목의 메일에서 “연정이 성공하면 독재와 타도, 불신과 대결로 점철되어온 우리 정치에 신뢰와 협력, 대화와 타협이라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연정을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위한 핵심 고리로 본 것이다.
연정(연합정부)은 다당제가 자리잡은 내각제 국가에서 의회 다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 간 연합이다.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 대선은 사생결단의 장이다. 이기면 모든 것을 차지하지만, 지면 교도소에 갈 생각까지 해야 한다.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는 중앙부처 장차관과 고위직 공무원, 공공기관 기관장과 임원 등 3000개에 달한다. 법원, 검찰, 각종 관변단체 등을 합치면 1만개가 넘는다고도 한다. 대선에 이긴 쪽이 모든 자리를 차지한다. 대통령은 인사권을 무기로 왕이 됐다. 이런 독식 구조가 우리 정치의 가장 큰 폐해로 지적되는 진영 간 대립과 분열의 정치를 키우는 토양이었다.
대립의 정치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개헌 시도들이 있었다. 3당 합당, DJP 연합 모두 내각제 개헌이 핵심 동력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개헌을 제안했으나 울림이 없었다. 개헌을 위한 국민적 동력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대통령의 통합 약속도 있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권위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고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며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2년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국민대통합으로 시작했다. 결과는 국정농단과 수감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는 모두 진영을 가리지 않는 인재 발탁을 약속한다. 이 말이 지켜질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김성식 전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 “경선을 통과해 대선 후보가 되면 괴물이 되기 시작하고, 본선을 통과해 대통령이 되면 거의 괴물처럼 된다”며 “후보 사람됨의 문제가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권력 제도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라는 글을 올렸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과거 대통령들은 상대방 진영의 인재들에게 장관 자리를 제안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제안을 받은 정치인들은 모두 거절했다. 대통령 제안에 응하는 순간 자기 진영으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약속이나 선의, 배려에 기대어서는 타협의 정치가 이뤄질 수 없다.
개헌도 당장 어렵고 대통령의 통합 약속도 믿기 어렵다. 연정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현실적 인식 때문이다. 연정은 여야 간 공개적 약속을 기반으로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인데, 연정은 이를 공식화하고 정치투쟁을 정책투쟁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대선을 앞둔 현 상황에서 지역주의 연합 성격이 짙었던 DJP 연합이나 내각을 통째로 넘기는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방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외교·안보와 과학기술 등 국익을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 추진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여야 간 연정은 고려할 만하다. 여야 대표들이 해당 분야 정책적 우선순위를 정리해 공개하고, 어떤 장관들이 임명되더라도 합의된 정책과제들을 지킬 것을 공개적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장관 인사청문회 대신 정책 합의문 작성에 더 시간을 쓰는 방식이다. 문재인정부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법무부 장관을 연정 합의 대상 부처에 추가해도 좋을 듯하다. 사실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 캠프의 외교·안보 참모들을 보면, 큰 정책적 차이점을 느낄 수 없다. 국익 우선이라는 같은 결론을 다르게 말하며 편을 가를 뿐이다. 대선이 80여일 남은 시점에 연정을 말하는 것은 몽상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재명의 유능함, 윤석열의 공정함과 같은 단어들에서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열의 종식, 진영주의 극복과 같은 단어에 눈이 꽂힌다. 연정을 약속하는 후보, 연정을 위해 상대방과 물밑 협상을 벌이는 ‘핵관’이 있으면 좋겠다.
남도영 논설위원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