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넷플릭스 ‘지옥’의 종교적 질문

입력 2021-12-17 04:08

미디어학자에게 드라마 ‘지옥’은 흥미롭다. 새진리회를 만든 정진수의 교리를 세상이 처음 믿게 될 때, 그 교세가 크게 확장할 때, 비밀단체 소도에 의해 그 허구성이 폭로될 때, 언제나 중심엔 미디어가 있다. ‘지옥의 시연’은 어느 편에서나 잘 연출하고 활용해야 할 ‘미디어 이벤트’다.

종교에 관심 있는 미디어학자에게 ‘지옥’은 한층 더 흥미롭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적인 것’에 대한 주도권이 제도권 종교로부터 미디어로 옮겨간다는 주장의 또렷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죄, 심판, 신(神), 참회, 말세, 새 세상 등 종교의 언어를 직설적으로 다룬다. 또 새진리회로 상징되는 기성 종교를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 그렇다고 ‘지옥’의 메시지를 기독교 도발로 치부하는 건 너무 편협하다. 대중적 공감을 확보한 텍스트가 던지는 종교적 질문에 집중하는 게 훨씬 유익하다.

먼저 ‘지옥’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해석’의 절대성을 질문한다. 드라마가 끝까지 풀지 않는 설정은 ‘시연’으로 일컬어지는 초자연적 현상이다. 천사의 ‘고지’, 지옥의 ‘시연’ 모두 여기선 팩트다. 극 중 누구도 통제하지 못한다. 다만 그 해석을 새진리회가 독점함으로써 또 다른 지옥을 낳을 뿐이다. 해석이란 본디 잠정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신의 의도라는 절대의 영역으로 전환해 타자의 불행을 너무 쉽게 재단해버리는 기성 종교에 대한 은유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재난, 사고, 죽음처럼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직접 해석하거나 또는 경합하는 해석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종교적 존재임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지옥’은 불완전한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고 다 이해할 수도 없는 삶과 죽음, 질병과 고통에 대한 진실한 해석은 무엇이며, 누가 그걸 제공할지 묻는다. 박제된 교리로써 그 기능을 하겠다는 건 심각한 착각이란 점도 확인한다.

죄란 무엇일까도 질문한다. 새진리회는 폭행, 사기, 강절도 등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구체적 행위만을 죄로 규정한다. 사람들을 장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측 못 했던 신생아를 향한 고지로 이 논리는 무력화된다. 이렇게 새진리회 방식의 죄 규정을 부정함으로써 드라마는 이를 시청자 몫으로 돌린다. 인간 내면의 죄성, 타인과 사회에 대한 책임, 구조적 악은 또 어찌할 거냐고 묻는다. 죄만큼 종교마다 다르고, 종교와 세속 사이의 괴리가 큰 주제도 없다. 그래서 대중적 성공을 거둔 드라마가 직접적으로 죄의 문제를 건드렸다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세속과의 대화에서 종교가 가장 어려워할 신학적 주제에 미디어가 진지하다는 건, 종교도 답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 구원에 대해 질문한다. ‘지옥’과 ‘오징어 게임’은 종말론적 정서를 공유한다. 돌아보면 또 하나의 K 열풍 ‘기생충’도 그랬다. 대중문화에 반복되는 비관과 절망의 패턴은 역으로 구원을 향한 갈망을 전제한다. 정진수는 새 세상을 꿈꾸며 “너희는 더 정의로워야 한다”고 외친다. 그에게 정의란 누구도 죄짓지 않는 표백의 상태다. ‘지옥’은 그런 세상에 회의적이지만 진정한 구원이란 내세가 아닌 지금 여기의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한 종교의 비즈니스 모델, 공포 마케팅으로는 결코 정의를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제시한다. 주요 인물들의 선택으로 달라진 세상들을 나란히 전시하며, 우리의 선택은 뭐냐고 질문한다. 또 종교는 여기에 뭘 할 거냐고 묻는다.

‘지옥’은 사적 복수 코드, 힘없는 개인을 향한 좌표 찍기와 집단 폭력 등 우리의 많은 부분을 읽어낼 수 있는 두툼한 텍스트다. 죄, 구원, 해석을 둘러싼 질문들 역시 우리 사회와 대중이 지금 얼마나 ‘종교적인 것’에 관심이 깊은지를 알려주는 ‘고지’와도 같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