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상가 리쩌허우가 지난달 별세했다. ‘중국근대사상사론’ ‘중국고대사상사론’ ‘중국현대사상사론’ 3부작을 완성한 그는 1980년대 중국 학계에서 진행된 문화열(文化熱) 논쟁의 주역 중 1명이었다.
80년대 중국은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지만 사상적으로는 혼돈상태였다. 중국 공산당이 79년 개혁개방노선을 천명했지만 미래는 불확실했다. 문화대혁명 10년의 광기와 폭력이 던진 충격도 가시지 않았다.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의 5000년 역사와 근대화 과정을 되돌아보며 문혁과 같은 비극이 왜 발생했는지, 중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질문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94년에 펴낸 ‘현대중국의 모색’에 이들의 분투가 잘 정리돼 있다.
리쩌허우의 주장은 서체중용론으로 요약된다. 중국 근대화기에 등장한 중체서용론을 뒤집어 서구 자본주의 체제를 본체로 삼고 중국 전통문화를 도구로 보자는 주장이다. 리쩌허우는 중국의 전통사상에 들어 있는 문화심리 구조가 사회구조나 의식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며 중국은 아직 근대화되지 못한, 근대화 이전 사회라고 비판했다.
과학철학자 진콴타오와 해석학자 간양을 대표로 하는 철저재건론은 더 급진적이었다. 진콴타오는 시스템 이론에 기초한 초안정구조론을 내세워 중국 역사에는 수천년간 왕조 교체만 있었을 뿐, 시스템 변화는 없었다고 분석했다.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도 왕조 교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중국 문명은 죽었으므로 서구 문명으로 바꿔야 하는데 문화는 하나의 시스템이므로 전체를 통째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판계승론은 전통과 현대, 서구와 중국의 문화 중 우수한 요소만을 비판적 시각으로 가려내 계승하자는 입장이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까지 가져가겠다는 발상이라 중국 공산당 입장과 가까웠다. 전통 유학의 부흥만이 해법이란 유학부흥론도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이유를 유교 전통에서 찾는 유교자본주의론과 맥이 닿아 있다.
89년 톈안먼 사태 후 중국 공산당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문화열은 시들해졌지만, 사상적 유산은 남았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시대의 질문에 응답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토론했고 그 과정에서 독창적이고 심도 있는 문제의식과 사유가 등장해 고도화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도 정의 공정 분배 자유 페미니즘 인공지능 생명윤리 같은 문제가 있다. 세계인이 공감하는 보편적 주제도 있고 한국적 특색이 강한 것도 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은 빈부격차와 무한경쟁 같은 보편적 주제를 한국적 배경과 서사 속에 녹여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적 인기를 끈 배경에도 고립되고 자존감 낮아진 현대인을 위로하는 메시지의 노래들이 있다. 고도성장을 구가한 한국에 세계적 문제들이 농축돼 있는 셈이다.
반면 한국이 개발도상국 중 유일하게 산업화 민주화에 성공하고 선진국에 진입한 동력이 무엇인지, 한류 콘텐츠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된 문화적·정신적 원천은 무엇인지는 한국적인 주제다. 시사·정치평론가들의 토론에 큰 기대를 하긴 어렵다. 최소한의 합리성이나 일관성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토론의 수준을 떨어뜨리거나 음모론을 유포하고 반지성주의를 부추기곤 한다. 일부 정치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목소리가 과대 반영되는 소셜미디어 환경도 심각한 문제다.
인문학자와 지식인들이 고민하고 답해야 한다. 공론의 장에 나서야 한다. 우리 인문학계에는 실력 있고 창의적인 학자들이 많다. 귀를 기울일 준비는 돼 있다. 미국 하버드대 철학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200만부 넘게 팔리는 나라 아닌가. K인문학 열풍을 기대한다.
송세영 문화체육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