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선거가 끝나면 우리는 늘 국민의 절묘한 선택에 감탄하며 그 선택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결과에 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전쟁 같은 선거판이 끝까지 간다면 과연 내년 3월에도 그런 감탄과 승복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이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번 대선이 유별난 것은 인물과 정책은 뒷전이고 정권교체 여부가 시대정신인 듯 지지층이 총결집한 진영 대결이 어느 때보다 격렬하다는 점이다. 선거 전 ‘쌍특검’ 요구나 선거 후 낙선자 감옥행 예언이 대수롭지 않게 들리는 험악한 선거판에서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 코로나 이후 민생 회복과 같이 국가 미래를 결정하는 과제들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내년 새 정부에 대한 기대보다 패자의 불복과 비협조에 대한 우려가 더 큰 이유는 노무현정부 이후 악화일로였던 양당 정치의 폐해가 마침내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은 것 같기 때문이다. 누가 되더라도 새 대통령은 패자의 상처를 살피고 정치 보복의 흉흉한 민심부터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새 정부의 구성이 순탄하려면 패자의 협조를 구해야 하지만 내년 정치 일정을 볼 때 잠깐의 정치적 평화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야당은 다가오는 지방선거와 총선을 위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새 정부의 실패를 위해 결사 항전에 나설 게 뻔하다. 새 대통령이 펼칠 미래도 야당의 공격 표적이 될 뿐이다. 이렇게 정치를 사생결단으로 몰아간 데는 문재인정부의 책임도 크다. 2017년 문 대통령이 적폐 청산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워 선거에 승리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집권 후 패자와 화해하고 정치를 정상화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다.
돌이켜 보면 2005년 ‘한국 정치,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야당과의 연정을 제안할 때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제대로 일을 하려면 진영 대결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유럽식 합의 정치를 위해 선거제 개편이나 연정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한 유일한 대통령이었지만 ‘참 나쁜 대통령’이란 핀잔만 들었다. 이명박정부는 대통합의 상징으로 고건 전 총리가 이끄는 사회대통합위원회를 만들고, 박근혜정부도 한광옥 전 노사정위원장을 영입해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맡겼지만 모두 간판만 남겼을 뿐이다.
대통합의 새 정치로 나아갈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던 문 대통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집권 초기 촛불과 탄핵 연대로 대통합의 밥상이 차려졌지만 그는 혼밥으로 일관했다. 2019년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을 위해 소수당 대표들이 단식 투쟁을 벌일 때나 개정 선거법을 무력화하는 위성 정당이 만들어질 때도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그는 유럽식 합의 정치에 대한 노무현의 꿈에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큰 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는 사회적 대타협과 통합 정부 구성이라는 판에 박힌 레퍼토리를 다시 들고 나오지만 이제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통합과 공치(共治)를 실현하려면 다른 정당과 정책 협상을 거쳐 정책 협약을 맺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대화와 타협의 새 정치도 가능하다. 지난주 출범한 독일의 신호등 연정은 친노동의 사민당과 친기업의 자유민주당, 친환경의 녹색당이 2개월 넘는 정책 협상을 벌였다. 이런 협상을 통해 제1당의 공약만이 아니라 다른 정당 지지자들도 동의할 수 있는 최대 공약수를 새 정부의 국정 과제로 제시했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하겠다.
한국의 경우에도 두 가지의 응용이 가능하다. 하나는 선거가 끝나는 즉시 대통령 당선인이 야당에 정책 협상을 제안하는 것이다. 취임 전까지 2개월여 협상을 벌여 타협안을 만들면 새 정부의 출범도 순탄할 것이다. 그리고 여야의 공통 공약뿐 아니라 오랫동안 서로 미뤄왔던 갈등 과제를 몇 가지라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선 후보 모두 이를 선거 공약으로 제시하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거대 양당이 후보 단일화에만 목을 맬 것이 아니라 심상정 후보나 안철수 후보와 정책 협약을 맺는 방법이다. 선거 전에 공통 공약과 공동 정부 구성에 합의한다면 무작정 단일화보다 더 높은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들도 정권 교체만 외칠 것이 아니라 꼭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을 타협을 통해 관철시키는 더 큰 지혜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최영기(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