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 vs 부인, 갈라진 ‘대장동 4인방’… 녹취록이 판단 가른다

입력 2021-12-18 04:05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의 핵심 피고인 ‘4인방’에 대한 재판이 막을 올렸다. 첫 재판부터 ‘내부 고발자’ 정영학 회계사와 나머지 3명의 입장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향후 재판에서 ‘정영학 녹취록’에 대한 판단이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게 됐다. 법조계에서는 녹취록의 증거능력과 신빙성 및 보강 증거 여부 등이 유무죄를 가를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본다. 단기간에 끝나긴 어려워진 재판이 얼마나 길어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녹취록, 가장 중요한 자료”

정 회계사의 녹취록은 의혹이 제기된 초반부터 검찰 수사의 얼개를 짜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정 회계사는 김만배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남욱 변호사 등과 나눈 대화를 녹음한 녹취록을 검찰에 자진해 제공했다. 이 녹취록에는 수익금 배분 문제와 정관계 로비 정황 등이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으로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그동안 도와준 대가를 지급하라”고 요구하고, 김씨 등이 “그동안의 기여를 감안해 700억원 정도를 지급하겠다”고 말한 대화 등이 포함됐다. 검찰은 이러한 대화 내용을 뇌물 약속은 물론 배임 혐의까지 구성하는 단초로 삼았다.

공소사실과 녹취록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만큼 검찰은 녹취록을 중요 증거로 내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17일 “사실상 내부 고발자가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녹취록이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남 변호사 측은 지난 6일 열린 첫 재판에서 “녹취록은 저희가 증거능력을 엄격히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견제한 바 있다. 정 회계사 측이 “녹취록 신빙성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만 실체관계가 드러날 수 있도록 재판에 협조하겠다”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증거능력 있나

법조계에선 녹취록의 증거능력 자체는 인정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 회계사가 제3자들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이라면 증거능력이 부인될 수 있지만, 본인을 포함한 당사자들의 음성이 그대로 녹아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녹음이 없으면 서로 말이 다르거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식의 다툼이 이뤄질 수 있지만 (녹음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대화 당사자가 녹취한 녹음파일은 기본적으로 증거능력이 있으며, 증명력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공소사실과 맥락을 같이하는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녹취록을 통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이번 사안을 놓고 국정농단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 등이 담긴 안종범 전 경제수석의 업무수첩이 주요 증거로 제출됐는데 피고인별 재판마다, 심급마다 증거능력에 대한 판단이 갈렸다. 대법원은 수첩 내용 중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받은 내용에 한해 공판에서 진술로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된 경우는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결국은 ‘대통령인 피고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걸 들었다’고 안 전 수석이 진술한 게 증거가 된 것”이라며 “(이번 사건에서도) 공소사실과 부합하는 이야기를 피고인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빙성 있나

다만 녹취록의 신빙성, 증명력을 두고는 치열한 다툼이 예상된다.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과 내용 자체가 신빙성을 얻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사 과정에서부터 “농담으로 주고받은 대화(유 전 본부장)”라거나 “신빙성이 의심되는 녹취록(김씨)”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녹취록의 증명력을 깨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향후 재판에서는 정 회계사가 녹음을 시작하게 된 이유, 정 회계사가 답변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는지 등을 재판부가 면밀히 따져볼 것으로 보인다. 재경지법의 부장판사는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농담을 했다는 등의 나머지 피고인의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지 등을 재판부가 살펴볼 것”이라고 내다봤다.

녹취록의 진실성을 담보해주기 위한 보강 증거가 필수적이란 시각도 있다. 녹취록상 정황을 실체화할 참고인의 증언, 돈이 오간 내역 등이 제시돼야 한다는 뜻이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가장 중요한 건 녹취록의 증명력을 높여주는 물증”이라며 “예컨대 녹취록에 나온 내용과 같이 발견된 자금의 흐름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고된 장기화

재판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이미 첫 재판에서 정 회계사를 뺀 나머지 피고인들은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며 다음 기일을 서둘러 잡는 데 난색을 표했다. 재판장은 “두 달이면 충분하겠나, 세 달이면 충분하겠나. (어떻게 해도) 부족할 것”이라며 이달 24일로 두 번째 준비기일을 정했다.

하지만 휴정기와 법관 정기인사, 추가 수사 상황 등을 고려하면 내년 3월은 돼야 재판이 본격화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결국 대선 이후에야 법정에서의 진검승부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구속된 인물 중 여럿이 보석으로 나온 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이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법원의 부장판사는 “재판이 최대한 빨리 진행되려면 검찰에서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자료를 콤팩트하게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임주언 박성영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