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투명경영 강화… ‘좋은 지배구조 찾기’ 실험 시작됐다

입력 2021-12-18 04:06
게티이미지뱅크

SK그룹의 올해 임원인사와 조직개편은 독특했다. 통상 계열사들을 총괄해 그룹 차원에서 조율·발표하는데, 올해는 제각각이었다. 지난달 1일 SK텔레콤을 시작으로 각 계열사 이사회에서 최고경영자(CEO) 선임을 포함한 임원인사, 조직개편 등을 따로 결정했다. 계열사의 이사회에서 인사·평가 등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SK㈜ 등 13개 관계사 사내이사, 사외이사들은 지난 6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거버넌스 스토리 워크숍’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지배구조 혁신을 논의했다. 그 결과가 계열사별 ‘이사회 중심 경영’이다. 이사회가 독립 의결기구로 권한과 책임을 갖는 것이다.

재계에선 SK그룹의 실험을 주목한다. 대기업집단(그룹)의 지배구조는 늘 뜨거운 관심사다. 좋은 지배구조는 투자자 유치, 주가 관리 등에 필수적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주목을 받으면서 지배구조는 더 중요해졌다. 그런데 오너 일가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게 맞는지, 지주회사 체제가 나은지는 논쟁거리다.


한국의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총수 일가 지배력을 낮추고, 투명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타를 맞추고 있다. 상법은 상장회사에 사외이사를 3명 이상, 이사 총수의 과반수로 선임하도록 규정한다. 사외이사는 이사회 등에서 회사업무 집행에 관한 의사 결정, 대표이사 선출, 대표이사 업무 집행에 대한 감독 등을 수행한다. 사외이사 제도는 1998년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 경영진·지배주주 독단적 의사결정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공시대상 기업집단 소속 상장사 274곳은 관련법상 최소 기준보다 총 120명 초과해 선임하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정부는 바람직한 지배구조로 지주회사를 든다. 순환출자의 불안정성이 드러나자 법 개정 등으로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지주회사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164곳에 그친다. 전년(167개)과 비슷한 수준이다. 2017년 요건 강화에도 규모는 엇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지주회사가 좋은 지배구조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지배구조는 무엇일까. 오너 경영은 없어져야 할 구습일까. 해외 유력기업 상당수는 총수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이사회 중심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유럽 최대 재벌인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소유한 기업들은 지배구조 정점에 발렌베리 재단을 둔다. 각 계열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맡지만, 장기 비전 등은 발렌베리 가문에서 결정한다. 미국의 포드, 덴마크의 칼스버그와 레고 등도 오너 일가가 세운 재단에서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ESG경영의 급부상에 맞춰 ‘이사회 중심 경영’에 시선을 두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사회는 거수기 역할만 하고 총수가 모두 결정하는 옛날 방식에서 투명성을 강화하는 이사회 중심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5년, 10년이 지난 뒤에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보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생길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업들은 이사회 안에 ESG위원회를 만드는 등 빠르게 시스템을 세우고 있다. 현대중공업 그룹은 전체 계열사에 지속가능최고책임자(CSO)를 선임해 ESG 거버넌스(지배구조)를 체계화했다. CSO는 지속가능성장 관련 이슈의 의사결정과 집행을 관리하는 최고책임자다.

GS칼텍스는 기존 CSR위원회를 ESG위원회로 확대 개편하면서 기후변화 대응, 친환경 신사업, 환경오염 물질 배출 저감, 지속가능 공급망 관리, 인권 리스크 관리 등의 이슈를 CEO가 의사결정하도록 했다. 준법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별도 독립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한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2월 독립위원회인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하고, 투명경영에 무게를 싣고 있다. 준법위는 삼성전자 등 7개 계열사를 감시·통제한다.

그러나 이사회 중심 경영 등의 시도가 실질적으로 지배주주나 경영진을 견제하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근본적으로 바뀌려면 이사회가 권한을 갖고 바꿔야 하는데, 아직도 이사회 권한이 크지 않기 때문에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가 근본적으로 크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총수 일가가 사익편취 규제대상 또는 사각지대 회사에 집중적으로 이사에 등재되고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총수 일가는 사익편취 규제대상 회사의 56.3%, 사각지대 회사의 20.9%에 이사로 등재됐다. 총수 본인은 1인당 평균 3개 회사에 이사로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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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좋은 지배구조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시도의 종착지는 ‘이익 창출, 주주 환원, 지속가능 경영 등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구조’라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가장 이상적인 지배구조는 실제로 의사결정하고 집행하는 사람이 사적 이익이 아니라 회사의 원래 주인, 즉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도록 만들어진 구조”라고 말했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좋은 지배구조란 쉽게 말해 회사 자원을 누군가 잘못 쓴다든가, 벌어들인 돈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을 때 감시하고 규율할 수 있는 구조다. ESG위원회 권한을 강화하고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가는 건 큰 발자국이지만, 제도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룹이나 지주회사에서 일종의 가이드라인 등을 준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자원의 최적 활용, 성과의 최적 보상 등 좋은 지배구조를 위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디테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