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올라프 숄츠 총리가 정식 취임하면서 독일에선 16년 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우파인 기독민주당(CDU) 소속이었고 현 숄츠 총리가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 당수인 만큼 보수에서 진보로 독일의 정치 지형은 바뀌게 됐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됐다고 해서 독일의 대내외 정책이 급격히 좌클릭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최저임금 인상, 반중국 노선 선회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메르켈 전 총리의 노선을 대부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숄츠 총리는 아예 대놓고 “독일의 외교 정책은 연속성의 정책”이라고 공언했다.
이렇듯 독일에선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급격히 국가 전체의 노선이 달라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독일 특유의 ‘대연정’ 때문이다. 숄츠 총리의 사민당도 이번에 녹색당, 중도 우파 계열의 자유민주당과 이른바 ‘신호등’ 대연정을 성사시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메르켈 전 총리도 16년 집권하는 동안 파트너를 여러 차례 바꿨다. 숄츠 총리는 메르켈 내각에서 노동사회부 장관,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대연정은 독일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원천이 돼 왔다. 독일 통일이 대표적이다. 독일 통일의 초석을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세웠고, 통일의 완성은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이뤄냈다. 역대 독일 최장수 외교장관이자 동서독 통일 주역이었던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소수당인 자민당 인사다. 그는 헬무트 슈미트 정권, 콜 정권 등에서 흔들리지 않고 좌우를 넘어 독일 외교의 중심을 잡았다.
역대 독일 총리의 리더십인 ‘실용주의’도 이런 대연정이라는 바탕 위에서 나왔다. 메르켈 전 총리는 협상과 타협의 달인으로 통한다. 그의 개인적 능력도 출중하지만 독일 특유의 대연정이 이런 그의 능력을 향상시킨 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숄츠 총리도 ‘정치 카멜레온’으로 불린다. 고교 때부터 사민당 당원이었던 그는 20대 후반까지 노동자 권리를 대변하는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막상 의원이 되자 강경 좌파 꼬리표를 버렸고, 2005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독일판’ 노동시장 개혁을 밀어붙이자 이를 강력 지지했다. 메르켈 전 총리도 우파 소속이었지만 다른 유럽 국가 우파와 달리 난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또 탈원전 정책을 고수했다. 두 인물 모두 정치 이념보다는 국익을 모두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런 정치 풍토 때문에 독일에선 정적(政敵)에 대한 복수도 없다. 메르켈 전 총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사민당 인사가 새 총리가 되면 잠을 잘 잘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정치적으로 차이는 있겠지만 평화롭게 잘 잘 수 있다”고 답했다. 한국도 차기 리더십을 뽑는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있다. 사실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는 한국의 정치 풍토에선 대연정을 기대하기 힘들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야당 반대와 진정성 논란 등으로 무산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차기 정권은 독일 대연정의 극히 일부라도 도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다른 당 인사를 일부 입각시키고, 정책 입안 단계에서부터 협상과 타협에 중점을 두자는 것이다. 한국 정치엔 현재 증오와 대결만 있다. 현 정부에서 야당의 동의를 얻지 않고 임명된 장관급 인사가 무려 34명으로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사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우리 정치에서 포용과 중재, 타협이 실종된 극명한 예다. 우리 정치권이 독일 국력의 근원인 포용과 실용주의를 배웠으면 한다.
모규엽 국제부장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