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역사상 초유의 정답 유예
평가원 ‘이상 없음’ 결론 내고
법원 판결 대비 안해 혼란 자초
수시 발표 미뤄지며 차질 빚고
‘불수능’으로 난이도 조절 실패
첫 문이과 통합, 선택과목 격차
평가원장 사태 수습 후 물러나고
교육부는 입시 차질 없도록 해야
평가원 ‘이상 없음’ 결론 내고
법원 판결 대비 안해 혼란 자초
수시 발표 미뤄지며 차질 빚고
‘불수능’으로 난이도 조절 실패
첫 문이과 통합, 선택과목 격차
평가원장 사태 수습 후 물러나고
교육부는 입시 차질 없도록 해야
시간은 있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의지가 없었을 뿐.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역사상 초유의 빈칸 성적표가 학생들에게 배부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문제 제기는 지난달 18일 수능이 끝난 직후였다.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이 잘못됐다,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하지만 평가원은 오만했다. 처음부터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닫았다. 시늉은 했다. 관련 학회에 자문을 구했는데 문제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가원 간부가 원장으로 있는 학회였다. 끼리끼리 출제하고 평가한 셈이다.
움직인 건 이 과목을 치른 수험생이었다. 이들은 집단지성을 발휘해 여론을 환기시켰다. 해외 석학에게 이메일을 보내 의견을 구했다. 지난 2일엔 문항의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과 함께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평가원은 있을 수도 있는 오류를 따져보는 대신 이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국민 세금으로 대형 로펌을 선임했다.
수능 성적 발표를 하루 앞둔 날, 법원의 판결이 예정돼 있었다. 기자들은 강태중 평가원장에게 만약 법원의 정답 결정 집행정지가 내려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반복해 물었다. 답변은 참으로 무책임했다. 수능 역사상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전혀 고려하지도, 대비하지도 않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가능성이 크지 않은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해야 하는 게 국가다. 그런데 평가원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지켜보고만 있던 교육부도 마찬가지다. 그날 오후, 법원은 수험생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이 문항의 정답을 보류했다. 1994년 수능이 시작된 이래 특정 문항의 정답 결정 유예는 처음이다. 겨우 1.5% 학생이 치른 과목이 무슨 문제가 되겠나 했던 평가원의 오만함이 자초한 일이다.
끙끙대던 아이들은 이 한 문제 때문에 과목 전체가 흔들렸다고 울분을 토한다. 자연계 최상위권이 주로 지원하는 생명과학Ⅱ. 한 문제로 등급이 달라지고, 대학이 요구하는 수능 최저등급을 못 맞추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수험생에게는 어쩌면 인생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본안 소송 최종 판단은 15일 오후에 나온다. 법원이 대학 입시 일정을 고려해 당초 17일에서 이틀 당긴 것이다. 전원 정답으로 처리될 경우 응시생의 등급이 달라질 수 있다. 수능 최저가 있는 대학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미 입시 일정은 지연됐다. 16일이던 수시 합격자 발표가 18일로 미뤄졌다. 수능과 면접 등을 치르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발표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이틀은 꽤 긴 시간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학이다. 법원 판단이 당겨져 대학의 입시 사정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데선 벗어났지만 이로 인한 혼선은 불가피하다. 오죽하면 교육부가 대학에 생명과학Ⅱ가 전원 정답으로 결정될 가능성까지 포함해 합격자 명단을 1안과 2안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했을까. 수시 일정이 밀리면서 수시 충원 결과를 보고 전략을 짜야 하는 정시 지원자들도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 수능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수능을 마친 아이들은 문제가 어려웠다고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평가원은 쉽게 냈다는 말만 반복했다. 수험생들은 정말 나만 못 본 건가 하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 성적 발표를 보니 국어 수학 영어 모두 어려웠고, 지난 6월과 9월 모의평가보다 등급 컷이 하락했다. 그런데도 평가원은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해서 어렵게 느껴진 것이라는 편견을 갖는 것 같다. 코로나19 시국에 비대면 수업으로 학력 수준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험생의 학습 결손 부분도 충분히 반영했어야 할 일이다.
문·이과 통합으로 처음 치러진 이번 시험은 선택과목에 따른 유불리 조절에도 실패했다. 수학 1등급의 90%가 자연계일 정도로 문·이과 격차가 컸다. 이로 인해 자연계 수험생이 학교 수준을 높여 인문계 모집 단위로 교차 지원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데도 평가원은 선택과목 유불리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은 내놓지 않고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는 정시 전략을 짜기 위해 사교육 기관으로 몰린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은 이렇게 계속된다. 평가원장은 사퇴하는 게 마땅하다. 그게 조금이나마 일련의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수험생을 달래주는 일이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말이 무색하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