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8년차 현역… “신작 하면서 가슴이 뛰었어요”

입력 2021-12-18 04:06
신일숙 작가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자신의 대표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일러스트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작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평범한 작품에는 스스로가 만족을 못 해요. 얼마 전 끝낸 ‘카야’는 제 모든 것을 보여드리려고 한 작품이에요. 독자들도 어지간한 소설보다 만족도가 높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작품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양=권현구 기자

순정만화의 거장, 온라인 게임 ‘리니지’의 원작자, 한국만화가협회의 첫 여성회장…. 그를 설명하는 여러 수식어 중에 만화가 신일숙(59)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아마 ‘데뷔 38년차 현역’이라는 소개일 것이다.

그의 윗세대 여성 만화가가 드물고 1980년대 중반 순정만화 전성기를 함께 열었던 동료들의 신작 소식이 끊긴 지도 오래이지만, 그는 올해 두 편의 작품을 마무리했다. 첫 번째는 2017년부터 4년 4개월간 매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했던 장편 SF 판타지 ‘카야’이고, 두 번째는 유관순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들불’이다. 만화가 121명이 독립운동가 100인의 생애를 조명한 독립운동가 웹툰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막 ‘들불’ 원고를 끝냈어요. 연말까지 푹 쉬고 싶었는데 만화가협회 일을 해야죠. ‘카야’도 책으로 내야 하고요. 웹툰으로 200회였으니까 책으로는 18~20권 될 거예요.”

신일숙 작가의 최근작 ‘카야’. 거북이북스 제공

‘카야’는 만디엘라라는 행성계의 여왕이 되는 지구인 시나의 이야기다. 여성이 왕위를 잇는 가상국가가 배경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우주를 무대로 삼은 설정은 ‘1999년생’이 떠오르지만 지구와 우주, 고대와 현재를 오가는 스케일은 더 방대해졌고 지도자로 각성하는 주인공의 성장과 계급사회였던 만디엘라의 혁신이라는 서사는 한층 깊어졌다.

“‘카야’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감정에 감응하는 공동체를 대단위로 설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 만든 작품이에요. 제가 생각한 이상세계를 표현한 거죠. 경쟁은 하되 경쟁에서 이겼다고 부의 대물림을 계속하지 않는 사회예요. 그럼 빈부의 차가 크지 않고 기회도 균등해져서 불행의 요소가 많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카야’는 1986년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시작하기 전에 초기 단계의 구성을 마쳤던 작품이다. ‘리니지’와 ‘파라오의 연인’을 먼저 연재하면서 묵혀뒀다가 2008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어깨 인대가 대부분 끊어지는 사고를 당해 재활 치료를 하면서 중단된 상태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듬고 매만진 이야기는 처음 구상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주인공 시나가 수동적인 사람이었어요.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마지막에 자기의 뜻을 세우는 인물이었는데, 그게 제 마음에 안 들었던 거죠. 그래서 계속 뒤로 미룬 것도 있고요. 몇 번 수정을 거치면서 제가 생각하는 스타일의 인물이 됐어요.”

수동적인 주인공이라니, 그의 작품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순정만화의 기념비적 작품인 ‘아르미안의 네 딸들’만 해도 사랑이 전부인 캐릭터 대신 칼과 방패를 들고 운명에 맞서는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주인공을 등장시켜 단숨에 독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신일숙 평론서를 쓴 김은혜 박사는 ‘로맨스 플롯을 전복하고 여성의 성장과 해방을 그리며 순정만화의 폭을 넓혔다. 가부장적 신화를 해체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다시 쓰기에 도전한다’고 적었다.

“학생 때 책을 좋아했는데 로맨스는 못 읽었어요. 굳이 꼽자면 ‘제인 에어’ 정도였으니 로맨스와는 거리가 있었죠. 제가 읽던 건 삼국지, 수호지, 그리스·로마 신화, 플라톤의 책이었어요. 가부장적인 경상도 집안에서 자라며 중학생 때는 장래 희망으로 여성 해방 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독자들의 생각이 바뀌는 데 제가 아주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면 그것도 여성 해방 운동을 한 것 아니겠어요.”

유관순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들불’의 한 장면. 성남문화재단 제공

신일숙 작품의 흡입력은 실제 역사와 신화, 허구를 자유자재로 엮어내는 설정, 화려하고 섬세한 그림, 치밀한 연출에서 나온다. 그는 빈틈없는 탄탄한 이야기 전개로 탁월한 스토리텔러로 꼽힌다. 올해 말까지 카카오페이지에서 선보이는 ‘들불’도 누구나 하는 유관순 열사의 일대기이지만 그가 그리면 다르다. 유관순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를 투사로 만든 아버지와 어머니, 교사들, 친구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관순 못지않게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던 더 많은 사람이 있었고, 더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제목 역시 많은 이가 함께했기에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는 뜻을 담았다.

신일숙은 문하생 생활을 포함해 데뷔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데뷔 2년 만에 세 번째 작품으로 내놓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로 단숨에 스타작가 반열에 올랐다. 놀라우리만큼 빨리 성공했고 실패작 없이 긴 작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렌즈로 빛을 모으면 종이를 태울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자기의 재능과 개인 생활 모두를 집약해 하나에 몰두하면 해내게 되는 거죠. 다른 부분에선 좀 바보스럽다거나 모자라 보일 정도로 하나에 다 들어붓는 거예요. 저는 만화 말고는 취미가 없어요. 다른 걸 즐길 시간도 많지 않았고, 다른 걸 즐겼다면 지금과 같지 않았겠죠.”

그런 몰입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소식이 올해에도 있었다. 35년 전 옛 표지 그대로 재출간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사전 독자 펀드로만 1억2400만원어치 선판매를 기록했다. 낱권으로 판매되지 않는 20권 세트 가격이 16만원으로 적지 않은데도 5개월 만에 6만부가 팔려나가 5쇄를 찍었다. 지난 7월 NFT(대체불가토큰) 경매 시장에 나왔던 ‘리니지’ 1권 1화 첫 컷의 낙찰가는 14일 기준 1억3000만원에 달한다. ‘10년 후에도 찾아보는 책을 만들겠다’던 그의 꿈은 이미 이뤄져 출간 후 30년 후에도 사서 보는 작품을 남겼다.

“만화가로서 행복했죠. 작품을 할 때 힘들기는 해도 그리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카야’를 하면서 또 가슴이 뛰었어요. 즐기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더라고요.”

그는 완결되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도 언젠가는 끝내고 싶고 후속작으로 구상해 놓은 작품도 여러 편이 있다고 했다. 요즘 관심이 있는 주제는 성(性)이라고 했다.

“더 센 페미니즘 작품이냐고요? 아니에요. 여자들이 생각하는 성, 남자들이 생각하는 성, 그리고 순결 문제를 다루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제가 페미니즘 작가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요. 저는 여자도 힘든 게 있고 남자도 힘든 게 있는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창작의 기쁨’을 여러 번 언급한 그이지만 진작부터 카야가 자신의 마지막 장편이 될 것이라고 밝혀왔다. 지금 웹툰의 연재 방식대로 매주 한 번씩 장편을 마감하기에는 더이상 체력이 따라가지 않아 앞으로는 중편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작가들의 건강 문제는 불법 웹툰 사이트와 전쟁과 더불어 만화가협회의 주요 현안이기도 하다.

“저같이 오래 단련된 사람도 벅찬데 후배들은 진짜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요. K웹툰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작가들은 몸이 부서지고 있어요. 이러면 작가 수명이 짧아져요. 만화가들도 법적으로 적어도 3개월에 1회는 쉴 수 있도록 네이버, 카카오 대표님들과 의논하고 있어요. 국회의원들도 만날 계획이고요.”

그는 40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만화시장의 부침과 변화를 직접 겪어왔다. 출판사 몇 곳이 만화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대본소 시절부터 ‘르네상스’ ‘윙크’ 등의 만화잡지가 발행되던 1990년대 순정만화 전성시대를 거쳐 순정만화의 맥이 끊겼던 암흑기를 지나 K웹툰이 글로벌 시장을 휩쓸며 억대 연봉 작가들이 탄생한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셈이다.

“만화가의 위상은 굉장히 높아졌죠. 그래도 빈익빈 부익부는 확실해요. 연재를 하고 있다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저한의 선을 만들어주는 게 협회의 기본 목표예요. 반면 TV에 나오는 셀럽도 있죠. 요즘 만화가 지망생들의 꿈은 아주 명확해요. 단 한 편의 메가 히트작을 내고 일찍 은퇴하는 거래요. 하지만 그런 꿈으로 시작해도 만화라는 게 워낙 자기가 좋아서 들어오는 세계이기 때문에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결국에는 진짜 작가가 될 거예요. 어쨌든 들어오너라, 이런 마음으로 환영하고 있어요.”

고양=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