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에봉스, 내 이럴 줄 알았다. 올해 봄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가 제주도에서 리사이틀을 연다며 초대를 했다. 피아노를 배운 건 고작 8개월 정도. 하지만 그는 이미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가 돼 있었다. 빌 에번스를 기리며 자신을 빌 에봉스라 지칭하면서. 그러고 보니 그를 처음 만난 곳도 몇 년 전 제주에서다. 점차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자극도 별다를 것 없어지던 삼사십대 직장인 네트워크인 ‘낯선 콘퍼런스’라는 모임에서였다. 제주라는 이름에 설렜지만 2박3일의 일정은 희미했다.
남은 시간 동안 언제 육지로 돌아갈꼬 심드렁하기 그지없던 내 느슨한 기억 속에도 빌 에봉스, 그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본래 주름이 잡혀 있는 셔츠인 건지, 아님 잔뜩 구겨진 건지 알 수 없는 흰색 셔츠와 배기바지, 운동화, 무엇보다 그의 구레나룻. 사람들의 왁자지껄함에 묻혀 있다가도 예의 그 느릿한 말투로 툭툭 여운을 던지는 남자. 그렇게 함께 어울려 술에 취한 새벽녘, 집으로 돌아가 빌 에번스의 LP판을 꺼내서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를 들을 것 같았다. 그라면 그럴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주인공 와타나베가 나오코와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그녀 집에서 그 곡을 들은 것처럼 그 허무함과 고독, 충만함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21년 늦봄, 그를 홍대 앞 어느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제주에서 말 한 번 나누지 않은 그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바의 붉은 조명 속에서 그는 자유로워 보였고 슬퍼 보였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잠든 그를 바에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함께 술을 마신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남겨진 그의 한마디. ‘아침 해가 찬란하게 뜨는 새 아침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어.’ 그래, 역시, 당신은 우리 앞에 빌 에봉스로 나타날 줄, 내 이럴 줄 알았어.
그가 입은 흰색 셔츠의 주름처럼 우리는 질 들뢰즈의 주름과 리좀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인생을 얘기했고, 김언수 작가의 글을 읽고 깊게 감화받은 그에게 제주로 김 작가를 만나러 가자 도발했다. 아마도 그즈음이었을 것 같다. 그가 빌 에봉스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걸 확신했던 순간. “김언수 작가의 말대로 우리의 정체성 따위는 그냥 우리가 고집부리는 습관 같은 거니, 난 이제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이 돼야겠어.” 그래,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를 아는 친구들이 모두 그의 공연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기꺼이 휴가를 내고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각자의 ‘본캐’는 육지에 남겨두고 ‘부캐’로 완벽하게 변신을 했다. 패션 회사 팀장인 누군가는 알뜰살뜰 빌 에봉스 컨디션 관리를 하는 매니저 벵상이 되고, 아나운서인 누군가는 멋진 목소리로 리사이틀을 진행하는 사회자 피터가 됐으며, 대기업 부장인 누군가는 빌 에번스 살아생전 유일하게 그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했다는 여성 가수 모니카가 돼 빌 에봉스와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다. 그렇게 모두가 빌 에봉스와 함께 제주의 밤을 즐겼다. 육지에서라면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어느 직장, 무슨 직함이 나를 대신하는 이름이었겠지만, 빌 에봉스 리사이틀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저 빌, 벵상, 피터, 모니카, 소피였다.
“내년에 50대를 맞는다는 게 너무 무섭더라. 그래서 너희들을 제주도로 불렀어.” 연주를 끝낸 뒤 빌 에봉스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 내 본캐가 하릴없이 무력해질 때, 빌 에봉스처럼 내 마음속의 부캐를 발견할 일이다. 얼마 남지 않은 새해, 빌 에봉스처럼 악기 하나 새로 시작해서 연말쯤에 친구들과 공연을 해볼까, 오래 묵혀 뒀던 희곡을 꺼내서 낭독회를 해볼까. 본캐라면 주저했을 일을 부캐는 용기를 내더라. 빌 에봉스, 어쩌면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어. 빌 에번스의 앨범 제목처럼, ‘당신은 봄을 믿어야만 해요(You must believe in spring)’.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