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손자 같은 조카의 돌찬지

입력 2021-12-15 04:02

“(상략) 엄니 돌아가신 뒤/ 두어 해 뒤꼍 그늘처럼 사시다가/ 인척과 이웃 청 못 이기는 척/ 새 어머니 들이시더니/ 생활도 음식도 간이 안 맞아/ 채 한 해도 해로 못하고 물리신 뒤로/ 흐릿한 눈에/ 그렁그렁 앞산 뒷산이나 담고 사시다가/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숟가락 놓으셨다/ 그런 무능한 아비가 싫어// 담 바깥으로 싸돌았는데/ (중략)/ 크게 병들었는데 환부가 없다.”(졸시, ‘추석’ 부분)

고향에 사는 손아래 누이에게서 손전화가 걸려왔다. 부산의 막냇동생 부부가 낳은 조카 돌잔치를 자기 집에서 치르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코로나 상황이 가라앉기는커녕 갈수록 기승을 부려 꺼려지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그간 장남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불이행에 따른 자격지심이 발동해 쾌히 승낙했다. 긴급재난 상황만 아니라면 성대하게 조카 돌잔치를 치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지만 어수선한 시국인지라 약소하게나마 식구들이 모여 동생 내외와 조카에게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를 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마흔 후반에 시험관 시술로 얻은 피붙이이니만큼 얼마나 동생 내외의 감회가 남다를 것인가. 전화를 끊고 나니 지난날 우리 가족이 보내온 삶의 궤적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안 가득 쓴 물이 고여 오는 파란만장한 파노라마의 흑백 영상들.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새 엄니를 들이셨지만 서로 간 생활의 간이 맞지 않아 1년도 해로하지 못하고 갈라서게 됐다. 동생은 엄니 없는 세월을 무척 힘들어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는 엄니 대신 장남인 내가 나가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축하를 대신했다. 장성한 형제와 누이들은 그럴듯한 명분과 핑계를 만들어 집을 떠나 살았고 막내만이 엄니 돌아가신 후 술을 끼고 사셨던 아버지와 함께 지내야 했다. 그렇게 막내가 중·고교를 졸업하는 동안 결혼을 앞둔 연년생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게 됐다. 아슬아슬 버티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장맛비 만난 오래된 축대처럼 시나브로 무너져가다 결국 3년이 못 돼 쓰러지셨다.

식구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됐다. 제 몫의 가난을 지고 헉헉대며 사느라 누구도 막내를 챙기지 못했다. 고아가 된 막내는 저 혼자서 지하 터널 같은 삶을 감내해야 했다. 혼자서 호구를 마련하고 틈을 내 방통대를 나오고 사기업에 취직해 근근이 살림 밑천을 마련했으나 형편이 어려워진 사장에게 차용증도 없이 돈을 빌려주고 난 뒤 부도가 나는 바람에 졸지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막내의 사정을 알면서도 내 코가 석 자라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장가를 가겠다고 막내가 찾아왔다. 결혼식장은 그가 직장으로 있던 강서구 소재 교회였다. 그때는 나도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있는 터라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축하객이 무려 400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대개가 동생이 적을 둔 교회 교인들이었다. 잘 살아왔구나, 동생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결혼식 도중 나는 바보처럼 청승맞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니와 아버지에게 이제 걱정하시지 말라는 말을 속으로 거듭 되뇌면서….

결혼을 하고 난 후 동생은 아이를 갖기 원했다. 그러나 만혼이었던 제수씨에게 아이가 쉽게 들어서지 않았다. 수년을 시험관 시술을 한 끝에 비로소 아이를 갖게 됐다. 제수씨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아이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게 보살펴 주세요. 나는 절로 기도하는 심정이 됐다. 내 나이 예순넷, 아직 손자가 없다. 조카 돌잔치가 손자의 일처럼 기쁘다. 마음이 설렌다. 조카야, 고맙다! 어려운 시국에 태어났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