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대 가까이서 추모하자” 교회 벽에 이름을 새기다

입력 2021-12-14 03:01
교회는 성도들의 헌신으로 운영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도들의 자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다. 코로나로 예배당에 모이고 싶어도 제약이 많은 이때 믿음의 선진들(히 11:2) 이름을 아무 조건 없이 교회 외벽에 새기는 교회들이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되새기는 한편 다음세대의 신앙 전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평가다.

한명수 경복교회 목사가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교회 추모의 벽에서 앞서간 교인들 이름을 동판으로 새긴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 자락에 있는 경복교회(한명수 목사)를 찾았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으로 66년 역사를 이어왔으며, 경복궁과 청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오늘을 사랑하라(Love Today)’고 적힌 플래카드를 지나 교회 친교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추모의 벽이다. 붉은색 벽돌 위에 성도들 이름이 집게손가락 크기의 작은 동판에 새겨져 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도, 생몰년 등 숫자도 없다. 오로지 이름뿐이다. 부부는 벽돌 한 칸에 나란히, 가족들은 부모자녀 형제자매 등의 관계를 고려해 위아래로 배치하는 형식 정도만 갖췄다. 올해 돌아가신 성도 이름 옆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붙어 있다. 조용한 찬송가 반주가 흐르는 가운데 은은한 LED 조명으로 앞서간 가족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서 이 교회를 통해 남긴 신앙의 유산을 반추하는 공간이다. 한명수 경복교회 목사는 “교회 안의 좋은 신앙 흔적들을 기억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게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성도들과 함께 논의하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름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헌신하신 성도들이 천국에 가시면 보통 화장 후에 단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납골당에 가시게 되고, 자녀들은 이를 자주 찾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추모의 벽은 납골 시설이 아니고, 말 그대로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도들을 기억해 이름만 남겨 놓은 공간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신앙이 이 교회에 함께했다는 걸 다음세대에 보여주고 전수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름을 교회 건물 외벽에 남긴다고 해서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경복교회는 한 권사님이 익명으로 기부한 100만원가량의 재정으로 어르신을 위한 안전 손잡이 및 찬송가 음향 시설과 조명 시설을 설치했다. 이름표 크기의 동판은 단체 주문으로 할인받아 개당 5000원이 소요됐다. 규모가 작은 교회들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는 얘기다.

경복교회 협동목사인 미국장로교(PCUSA) 세계선교부 파송 부부 선교사 한명성 김지은 목사의 부친들도 이 교회 추모의 벽에 이름표로 남았다. 한 목사는 “저희뿐만 아니고 올해 돌아가신 성도들을 추모하는 주일에 후손들이 각자 부모님 이름 앞에 모여 꽃을 두고 함께 기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다”고 말했다.

한 목사는 “장로교 침례교 등 미국의 전통교회들도 교회 앞마당에 무덤을 두고 항상 죽음을 기억하는데, 한국은 저 멀리 산 너머에 부모님을 모시고 죽음을 오히려 더 멀리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죽음을 멀리하는 대신 종말론적 신앙 앞에선 교회가 이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목사는 “미국 전통교회들은 예배당 장의자(Pew)에 ‘○○○를 추모하며’(In memory of ○○○)로 선친들 이름을 남기고, 예배당 벽돌에도 부모님 이름으로 기부하는 문화가 남아있다”고 소개했다.

서울 종로구 안동교회 추모의 벽 앞에 한 성도가 서 있는 모습.

교회 외벽을 추모 공간으로 마련해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 곳도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의 역사 교회인 안동교회(황영태 목사)가 주인공이다. 안동교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2009년 추모의 벽을 설치하고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믿음을 나누다가 영원한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와 자매들이 이곳에 있다”면서 “몸은 우리를 떠났지만, 그들의 변함없는 믿음과 따스한 사랑은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있다”고 새겼다. 황영태 안동교회 목사는 “일 년에 두 차례 한식과 추석 때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