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표 공약은 ‘7·4·7’이었다. 매년 7% 성장으로 10년 내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해 세계 7대 강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였다. 대기업 감세와 ‘전봇대 뽑기’식 규제 완화가 성장률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했다. 공약이 발표됐던 2007년 당시 우리나라 장기성장률은 4%대였다. 그런데 이명박정부 5년간 장기성장률은 3%대로 전임 정부에 비해 1% 포인트가량 하락했다. 뒤이은 박근혜정부도 ‘3년 내 잠재성장률 4% 달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빚내서 집 사라’는 경기부양 시도도 있었지만, 이 정부하의 장기성장률은 이명박정부보다 1% 포인트 정도 빠진 2%대였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4%로 전망하고 있다. ‘깜짝 성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전년 마이너스 성장에 따른 기저 효과가 작용했다. 오히려 문재인정부 5년간 장기성장률은 1%대로 하락할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부터 30년간 연 8% 이상 경이적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30년간 5년마다 1%가량 장기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대한민국 5년 1% 하락의 법칙’을 주창하고 있는 서울대 경제학부 김세직 교수는 이대로라면 차기 정부의 장기성장률이 0%대, 즉 제로성장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했다. 장기성장률 0%대는 2년마다 한 번씩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700만 근로자가 일자리를 유지한다 해도 일부는 매년 소득 감소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기성장률 하락세를 되돌릴 수 없을까. 역대 대권 후보들이 최고 전문가를 영입해 경제정책을 구상하고, 집권 후엔 강력한 경기부양책과 통화정책을 동원했지만 장기성장률 하락 추세는 계속됐다. 결국 현재 대한민국 경제 시스템이 수명을 다했다는 얘기로 귀결된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때 6% 이상 고도성장을 한 유럽 일본 등 선진국도 수십년간 지속되고 있는 장기성장률 하락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 스페인은 장기성장률이 0%대로,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스는 마이너스까지 추락했다. 유일하게 미국만이 100년 넘게 2% 이상 장기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김세직 교수는 미국은 기술 혁신을 시스템화했다는 점이 차별화 포인트라고 말한다. 남의 것을 베끼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성장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창조형 인적자본이 성장을 이끄는 ‘창조형 자본주의 체제’ 구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 보장제도를 마련하고 창조형 인적자본에 투자할 조세·재정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2의 ‘오징어 게임’이나 ‘폴더블폰’ 같은 창조적 성장 동력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각에선 성장률은 더 이상 중요한 지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어른이 됐는데 계속 키만 재고 있는 게 맞느냐는 지적으로, 성인이 된 후엔 키가 아니라 혈압, 근육량 등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논리다. 즉 선진국 진입 후엔 성장률보다 출산율, 자살률, 중산층 비율 등 지속가능성을 판단하는 지표를 더 챙겨야 한다는 얘기다. 공감되는 지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가능성이 커지기 위해선 경제 성장이 꼭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대선이 3개월도 안 남았지만 유력 여야 대선 후보들의 경제 성장 비전이나 공약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성장판’이 곧 닫힐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인데도 ‘50조 지원’ ‘100조 지원’ 같은 선심성 공약만 난무할 뿐이다.
한장희 편집국 부국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