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신고에도 ‘진술서’만… 참극 막지 못한 경찰

입력 2021-12-13 00:02
경찰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의 집을 찾아가 여성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동생을 중태에 빠트린 이모씨가 12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기 위해 서울동부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서울 중구에서 경찰 신변보호를 받던 30대 여성이 살해된 데 이어 또다시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의 가족이 피살됐다. 스토킹처벌법 시행에도 여전히 가해자 분리 조치 미흡 등으로 신변보호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서울동부지법은 12일 신변보호 대상자인 A씨(21)의 모친을 살해하고 A씨 10대 남동생에게 중상을 입힌 이모(26)씨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 “범죄 혐의가 소명됐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 10일 오후 2시30분쯤 A씨 가족이 사는 서울 송파구 한 빌라를 찾아가 가족들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번 사건은 이씨에 대한 성폭력 수사 착수 나흘 만에 발생했다. A씨 부친은 지난 6일 “딸이 감금된 것 같다”며 이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부친은 A씨가 친구에게 보낸 ‘(이씨로부터) 도망치다 잡히면 죽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고 경찰에 이를 알렸다.

추적에 나선 경찰은 이씨와 A씨가 머물렀던 천안이 아닌 대구에서 두 사람을 찾아냈다. 경찰은 당시 피해자의 구체적 진술이 없어 이씨에게 자필 진술서를 쓰게 한 뒤 귀가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 날인 7일 A씨는 부친과 함께 경찰서를 찾아 “성폭행과 감금 피해를 보았다”고 진술하고 신변보호도 요청했다. A씨는 이씨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져 있던 채였고, 경찰 역시 A씨 얼굴의 멍자국 등 폭행 흔적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씨는 이후에도 불구속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이 때문에 경찰이 보복범죄 위험이나 재범 우려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판단해 분리 조치에 나섰다면, 참극을 막을 수 있었을 거란 지적이 나온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거주지를 이탈해 대구까지 갔다면 피해자가 신체의 자유를 억압당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현행범 체포도 가능했던 사안”이라며 “경찰의 적극적인 가해자 분리조치가 필요했다”고 했다. 스토킹처벌법은 잠정조치 4호를 통해 ‘유치장·구치소 입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경찰이 법원 허락을 받아 최대 1개월까지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보복범죄 위험이 있는 가족·지인이 보호망 바깥에 놓여 있다는 우려도 있다. A씨는 신변보호를 요청하며 스마트워치를 받았지만, A씨가 외출한 사이 범행이 발생해 스마트워치는 끝내 눌러지지 못했다. A씨 부친은 아내와의 통화 중 비명을 듣고 황급히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승 연구위원은 “데이트 폭력의 경우 가족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큰 범죄이기 때문에 가족도 철저하게 보호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씨가 A씨의 경찰 신고에 앙심을 품고 보복에 나섰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조사 중이다. 이씨는 “A씨의 주소를 ‘흥신소’를 통해 파악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리 흉기를 준비해 A씨 빌라 공동 현관문 주변에 머물면서 다른 입주민이 비밀번호 누르는 모습을 훔쳐봤다. 그는 “가족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지만, A씨를 포함한 가족에게 앙심을 품고 범행을 계획했을 수 있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가해자가 피해자 근처로 이동하면 자동으로 신고가 접수되는 기능 등을 스마트워치에 탑재하는 식으로 현실적인 보호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