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님이 열정을 가지고 최근 펼치는 ‘빈그릇 프로젝트’는 열왕기하 4장에서 선지자 엘리사가 과부와 두 아들에게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려 기름을 채우라는 데서 착안했다. ‘빈그릇 프로젝트’는 농촌교회와 도시교회 상생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첫 번째는, 도시교회가 농촌의 농산물을 소매하면서 도움을 준다. 두 번째는, 도시교회가 농촌교회에 매월 일정금액을 후원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빈그릇 프로젝트’로서 도시교회 성도 일부가 한 달에 한 번씩 주일마다 농촌교회를 방문해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즉 한 그릇 기름만 남은 농촌교회가 이웃 도시교회의 그릇을 빌려 기름(성도)을 채워 농촌교회가 정주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다. ‘빈그릇 프로젝트’는 도시교회 성도들과 농촌교회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면서, 농촌교회 예배가 살아나는 예배회복 프로젝트였다.
이 목사님에게 어떻게 동강교회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1993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입학하고 한 달 만에 학교가 휴교가 되어서 선교여행을 준비하고 강원도 정탐사역을 떠났습니다. 강원도 양구를 시작으로 인제, 원통, 평창을 거쳐 지금의 정선에 들어와 동강을 끼고 흩어진 무교회 오지 마을들을 전도하며 순회 사역을 하였습니다. 동강과 깊은 산골의 특성상 큰 마을이 없이 2가구에서 많으면 10가구를 넘지 않는 흩어진 마을들이 대부분이라 처음엔 교회를 어느 한곳에 세우지 못하고 마을을 순회하며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총신 낙도선교회의 공식 파송장을 받고 강원도 오지 순회사역을 하던 중 2007년 지금의 정선군 운치리 비닐하우스에서 2007년 1월 14일 첫 예배를 시작으로 동강교회가 세워져 14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는 순회사역자로 동네 일꾼처럼 생활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10여개의 마을들을 다니며 전도하느라 15년을 무교회 사역자로 마을주민들과 농사를 함께하며 살았습니다. 이후 동강교회가 세워지던 날 놀랍게도 27명의 교인이 생겼습니다. 15년을 순회전도자로 보내는 동안 하나님은 27명의 교인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은 전도자의 발걸음을 결코 헛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슴처럼 살아온 15년의 시간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역사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동강교회는 밭농사(옥수수,감자,콩,고추 등)를 위주로 생업을 하는 전형적인 산골 화전민의 후예들입니다. 800고지 정상에도 밭은 있습니다. 산업화로 이농한 농촌은 노령화 되어 60세 미만 청년들을 찾아보기 힘든 마을이며, 제각기 드문드문 집을 짓고 살기에 밀집된 마을의 형태가 없는 흩어진 마을들이 대부분입니다”라고 했다.
최근 3년 전부터 동강교회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귀농 귀촌 인구의 유입이 코로나의 영향으로 빠르게 진행되어 마을 주민의 70%가 귀농인 이었다. 원주민의 비율을 앞서고 있으며, 교회의 구성원들도 은퇴 이후의 2모작 삶을 위해 이주한 도시교인들이 1년 사이에 일곱가정이 생겼다. 당연히 교회는 부흥되었지만, 흩어져 살던 도시 교인과 원주민 교인들과의 정서적 연합과 신앙생활의 연계를 위한 성장통을 겪는 숙제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소명 받은 계기가 궁금해서 물었다. “19살이 되던 해 교회 청년부에서 여름 농촌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그 교회는 충청도의 작은 마을에 있었는데 그 교회의 목사님과의 만남이 저에게 감동이 되어 그 후로 농촌 목회에 대한 기도를 하게 되었고 6년 후 신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던 중 제 기도의 대부분이 교회가 없는 낙도 섬과 오지 마을에 집중되고 있던 중에 서울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학교입학 후 뜻있는 학우들과 씨앗선교회라는 농어촌 선교단체를 만들게 되어 방학이 되면 낙도와 오지로 선교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총신대학교 신대원 재학 중 총신낙도선교회에서 간사로 섬기며 많은 시간을 낙도와 오지 특히 교회가 없는 무교회 지역에 관심을 갇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동강교회를 목회하면서 이 목사님은 가장 힘든 일이 혼자라는 ‘외로움’이라고 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막상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면서 함께 의논하고 나눌 대상이 없다는게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주거와 생활이 떠도는 목회라 아내와 아이들도 함께 하지 못하였기에 혼자 해야할 것들에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순회 사역을 할 때에는 종일 걸어가도 사람 한 명 못 만날 때도 잦았습니다. 한번은 산에서 길을 잃어서 이틀을 헤맨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외로움 중에도 늘 하나님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첫 예배당을 건축하던 시기에 신대원 후배 다섯 명이 여름방학 중에 건축자재를 싣고 찾아왔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알고 20여 평의 조립식 교회를 건축하자고 왔는데 자재가 바닥이 나 모자라 더 이상 건축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 연락해서 외상으로 자재를 부탁했는데 다음날 아침 자재를 실은 트럭 한 대가 도착했습니다. 자재를 내리고 차를 운전하고 온 트럭의 운전사 부부가 저에게 무엇인가를 손에 쥐어주며 ‘목사님 여기가 이렇게 깊은 산골인 줄 모르고 왔어요. 그리고 이 자재가 예배당을 건축하는 자재인줄 몰랐어요. 너무 깊은 산골에 교회가 세워지는게 감동인데 제가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요. 죄송해요’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제 손에 3만원을 쥐어주며 급히 떠나갔습니다. 저는 그 헌금 3만원을 들고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기둥만 세워진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이 예물 위에 축사해 주소서’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무사히 건축을 끝냈습니다. 그 젊은 기사부부는 그날 서울로 가며 우동 한 그릇 먹을 전 재산을 산골 교회 건축헌금 으로 드리며 굶고 갔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목사님의 평소 목회철학은 “저는 평소 정주를 소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곳에 머물며 바르게 살아보자’입니다. 이곳 정선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모습을 닮아 간다는 것은 이 분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살면서 지내는 것 그리고 정직하게 주어진 환경을 나누는 것이 예수 공동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길 못 떠납니다”고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신학교 시절 산골로 처음 전도하러 갔을 때에 만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인데 저를 박해해도 계속 찾아가 일을 거들어 드리고 말벗이 되자 결국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한사코 세례부터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에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천국 간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으신 직후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분이라 저 혼자 직접 장례를 치러 드렸는데 ‘아 하나님이 이 분을 위해 날 예수 믿고 신학교에 보내시고 할머니 마지막 시간에 딱 맞추어 여기로 보내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고 했다.
복음화율 3.5% 미만인 강원도 미전도 지역에서 교회 먼저 세우지 않고 15년 이상을 발품 팔아 걸으며 지역 주민들과 삶을 함께 하면서 전도해오다가 교회가 세워진 동강교회는 이 목사의 삶으로 세워진 교회였다. 이 목사님은 “철저하게 지역과 주민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 먼저 세우면 주민들은 저를 외부인으로 인식합니다. 주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관계 속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드디어 주민들의 요청으로 동강교회가 세워졌을 때에 그 교회는 주민들의 교회가 되었습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