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보다 어렵다는 교회 하나 됨? 기득권 포기하면 돼”

입력 2021-12-13 03:03
박영진(오른쪽) 부안동부교회 목사가 12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교회 입구에 설치된 단일화 기념비 앞에서 이희주 사모, 박성호 장로와 함께했다.

담장 하나를 두고 44년간 갈라져 있던 두 교회가 합쳐 전북 부안동부교회가 된 것은 2005년 4월이다. 교회는 2019년 제비뽑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가입을 결정했다. 통합의 주역이었던 박영진(66) 목사는 오는 25일 성탄절 예배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12일 교회에서 만난 박 목사는 “남북통일보다 더 어렵다던 교회 단일화는 3년 걸렸지만, 교단 결정엔 14년 걸렸다. 교단 분열로 교회가 쪼개진 역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장통합 소속 오중교회와 예장합동 소속 오중제일교회는 원래 한 교회였지만 1961년 교단이 갈라지면서 두 교회가 됐다. 지역 전도를 나가면 ‘당신들이나 하나 된 다음에 오라’는 핀잔을 들었다.

박 목사는 “2001년 부임했더니 어떤 불신자가 와서 신세 한탄을 하는데, 자기 형은 앞쪽 교회 장로이고 아내는 뒤쪽 교회 집사라 하더라”면서 “‘형님을 따르자니 마누라가 울고, 마누라를 따르자니 형님이 운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낯뜨거웠는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감정의 골이 깊었던 이유가 있다. 규모가 컸던 통합측 교회가 언젠가 합동측 교회를 흡수해야 한다며 바로 앞에 2층 예배당을 지은 것이다. 박 목사는 “주일마다 양쪽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이 마치 통일전망대에서 들었던 대북·대남방송 같았다”면서 “그 더운 여름날 에어컨도 없이 옆 교회 찬송 소리를 막으려고 창문을 닫고 예배드렸다. 양쪽이 뿌리는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며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5년 교회 통합 전 나란히 위치한 2개 교회.

박 목사는 전주대 총장을 지낸 고 엄영진 당시 장로와 통합측 교회 목회자의 의중을 타진했다. 그러다 통합측 교회에서 분란이 생기면서 먼저 합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후 장로 3명씩 6인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단일화를 논의했다. 결국 통합측 교회 목사는 임지를 옮겼고 두 교회는 동시에 교단을 탈퇴했다.

박 목사는 “교회 통합 예배는 마을 잔치 같았다. 분열의 상징인 담장, 2개의 십자가 종탑을 철거하는 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이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는 말씀이 딱 들어맞았다”고 했다.

두 집 살림하던 교회가 합하자 복음 전파에 유익이 컸다. 노인대학과 부안동부복지센터를 운영하며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농촌교회의 한계상 2013년을 기점으로 교인이 감소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교회를 합치고 담장을 허무는 장면.

그는 “교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됐지만 교리적·도덕적 방파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서 “그래서 여러 풍파가 있었지만 2019년 교회 청소년과 장로 등 9명이 제비뽑기를 했고 예장합동으로 교단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박 목사는 “교회는 그동안 교단 문제로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면서 “교회 연합과 일치에는 무관심한 가슴 아픈 현실을 피부로 느꼈다. 우리 교회와 같은 아픈 역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하나 됨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박 목사의 첫마디는 ‘기득권 포기’였다. 그는 “희생이 전제되지 않는 화합은 불가능하다”면서 “영적 지도자는 자아를 죽이다 쓰러지더라도 인내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마지막에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결국 하나 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교회도 교단도 남북도,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조기 은퇴를 선언한 그는 2년 전 후임자를 선출하고 동사목사 제도를 운영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당부도 ‘포기’였다. “자기 목회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목회를 해야 합니다. 내 것을 철저히 포기하면서 말이죠.”

부안=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