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K방역, 신뢰의 위기

입력 2021-12-10 04:03

영화 ‘컨테이전’은 백신 개발로 끝난다. 동물실험을 겨우 마친 백신을 자기 몸에 주사한 연구원의 헌신이 백신 출시를 앞당겨 치사율 20% 바이러스가 창궐한 영화 속 세계는 수습된다. 코로나19 등장 후 역주행한 10년 전 영화와 달리 현실의 바이러스는 백신 등장에도 물러날 기미가 없다. 모습을 바꿔 백신을 우회하고, 거리두기 완화로 더 자주 눈에 띄는 숙주를 옮겨가며 증식한다.

화이자사는 지난해 11월 ‘과학이 이긴다(Science will win)’는 구호를 미국 뉴욕 본사 벽에 걸었다. 백신 출시를 앞두고, 팬데믹을 끝낼 돌파구를 찾았다는 자신감으로 읽혔다. 그 옆에 ‘과학은 끈질기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Science is relentless, It never gives up)’는 문구도 있었다. 1년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바이러스 역시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바이러스가 알파, 베타, 감마, 델타를 거쳐 13번째 오미크론으로 변했듯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예측하고 대응하기란 힘들다. 백신 출시 전부터 백신이 나와도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망이 많았다. 재미 백신 연구자 문성실 박사는 지난해 7월 책에서 “코로나와 우리는 ‘끝’이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바이러스는 종식시키기보다 위험이 줄 때까지 관리해야 할 상대에 가까운 것이다. 최근 영국 전문가 그룹이 코로나19가 예측 가능한 풍토병으로 정착하기까지 최소 5년은 걸린다고 내다본 것도 비슷하다. 다만 이 기다림엔 신뢰가 동반돼야 한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바이러스에 즉시 대응하기 위해선 각 주체 간 신뢰의 끈이 두터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단계적 일상회복 이후 현 위기는 방역의 위기이면서 신뢰의 위기다. 위중증 및 사망자 증가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정부는 수습 과정에서도 미덥지 못했다. 바이러스의 가변성과 여러 이해를 조정해야 하는 정부의 곤혹을 감안해도 그렇다. 사적모임 인원 제한과 청소년 방역패스 도입이 담긴 후속 조치는 대통령이 “어렵게 시작한 단계적 일상회복을 되돌려 과거로 후퇴할 순 없다”고 한 지 나흘 만에 떠밀리듯 나왔다. 특히 청소년 방역패스는 사실상 접종을 강제한 것으로 당초 ‘권고’인 걸 감안하면 더 신중했어야 한다. 당사자는 물론 부모의 심정도 헤아렸어야 했다.

‘K방역’은 의료진의 헌신과 함께 국민 협조에 크게 빚지고 있다. 사람이 없어도 마스크를 꼈고, 몇 명까지 모이라면 그렇게 했다. 무엇보다 백신도 잘 맞았다. 공급 문제로 접종이 들쭉날쭉했음에도 접종 완료율은 80%를 넘겼다. 한국에 앞선 나라가 손에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먼저 백신을 맞은 이스라엘 영국 미국에도 크게 앞선다.

그간 백신 접종 후 사망 의심 신고 1300여건 중 2건만 인과관계를 인정받았다. 사망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의문이 컸지만 기저질환자라는 답변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접종에 동참한 건 정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현 방역 위기는 규모 면에서도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신뢰에 큰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앞선 코로나19 유행 때와 다르다. 3차 접종을 비롯한 접종률 제고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얼마나 갈지 모르는 코로나19와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신뢰의 위기를 방치해선 안 된다.

김현길 사회부 차장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