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종교사회학자 로버트 우스노우는 저서 ‘동정의 행위(Acts of Compassion)’에서 동정의 중요성을 차분하게 역설한 바 있다. 그는 먼저 동정과 관련된 현실을 폭로하는 한편 그런 현실도 인정한다. 그에 의하면 미국이 자원봉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자유, 성공, 자신의 이익 등이 우선시되는 개인주의적 사회이고, 동정이 개인적 차원의 배려를 넘어 사회적 차원의 정의를 실현하기에도 한계가 있다. 더구나 역설적 이야기지만 미국은 자원봉사 체제가 발달돼 사람들이 굳이 희생을 각오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더라도 작은 시간과 에너지만으로도 할 만한 소소한 동정의 행위가 많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동정, 돌봄(care), 베풂(giving)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동정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또한 고귀하게 한다. 설사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직접 돌봄을 베푸는 사람이거나 돌봄을 받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동정은 좋은 사회란 과연 어떤 사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배려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하며, 우리를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폭넓은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자리 잡게 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에 동정, 돌봄, 베풂, 공감 등이 빠진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의 주장을 조금 더 강화한다면 비록 동정의 행위가 너무 약소하고 심지어 자기도취적인 것이 될 염려가 있더라도,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는 놀랍고, 사회를 인간미 넘치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동정이 일상이 되는 사회는 막상 내가 동정이 필요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나도 그런 동정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다양한 극단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위험사회를 넘어 재난사회로 돌입하는데다 각박하기 짝이 없는 각자도생 사회의 양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갈수록 도움은 필요해지는데 도울 사람도 도움을 받을 기대도 없어지고 있다. 한국이 공식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는데도 말이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전 생애를 여러 발달 단계로 나누면서 중장년기(약 40∼65세)의 덕으로 돌봄을 손꼽았다. 한마디로 돌봄이 바로 어른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회가 돌봄의 정신을 공유한다면 성숙한 사회이고, 돌봄을 베푸는 사람이 많으면 행복한 사회인 것이다. 돌봄을 기준으로 한국 사회를 판단해볼 때 과연 한국 사회의 돌봄지수는 얼마나 될까? 한참 지난 이야기지만 길을 지나다가 ‘무슨 상관?’(Who cares?)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를 본 적이 있다. 참 고약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 사회를 보면 양극화, 극단적 주장, 상호 비방, 안하무인, 나 몰라라 현상 등이 판을 치고 있다. 스티커 내용을 이용한다면 오히려 정반대로 ‘상관있어!’(I do care!)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할 텐데 말이다.
최근 중학생들이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를 에워싸고 돌본 훈훈한 소식이 기사화됐다. 사리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아기들도 옆의 아기가 울면 따라서 우는 공감 능력을 보이는데, 어쩌다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성장할수록 공감 능력을 상실해가는지. 필자가 수년 전 외국 사역을 마감할 때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마 5:41)는 말씀이 새겨진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10리가 아니면 6리라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정의 일상화를 위해 이제라도 시민은 인식을 높이고, 지도자는 법제화와 제도 개선 등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다.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