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유채꽃 소녀

입력 2021-12-11 04:07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연말을 실감할수록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도 잦다. 올해 나를 기쁘게 한 일은 무엇인지, 슬프게 한 것은 무엇인지, 어떤 번민을 했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굵직한 마디들을 짚어본다. 시간이 빠르다는 말을 달고 사는데 두세 달 전 일도 가만 생각하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이따금 적는 일기장이 제 몫을 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드문드문 채워진 불성실한 기록이지만 모아 보면 의식하지 못한 변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 올해 일기장에는 예년과 다르게 특정 인물이 유독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이 인물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와 뗄 수 없는 존재였으나 나는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를 바로 보게 됐다고 고백한다. 올해로 아흔이 되신, 나의 외할머니 얘기다.

내가 종종 할머니를 언급하면 주위 사람들은 갑자기 웬 할머니냐며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할머니랑 원래 친했어?” “할머니가 가까이 사셔?”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는 멋쩍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평생 대전에서 살아온 할머니는 가족 행사가 있을 때 드물게 만나는 집안의 어른이었다. 기차로 이동해야 하는 물리적 거리는 ‘바쁜 손녀’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됐다. 할머니에게는 10명이 넘는 손주가 있고 나는 서열상 맨 앞도 맨 마지막도 아닌 중간쯤 끼어 있으니 할머니에게도 내가 ‘손주 1’에 불과하리라 여겼다.

그런 마음을 고쳐먹은 계기가 있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적에 꽤 근사한 유채꽃밭을 만났다. 지대가 높아 앞으로는 바다가 뒤로는 거대한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꽃밭으로 다가가자 표현이 적은 할머니의 입에서 “아이고 곱다” “아휴 예쁘다”는 감탄사가 쏟아졌다. 이내 할머니는 “나 사진 하나 찍어 다오”라며 내 팔을 놓고 힘차게 꽃밭 사이로 걸어갔다. 그 적극성에 놀란 것은 나였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무엇을 해 달라거나 무엇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욕구를 표현하는 건 참고 참다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돼서야 툭 튀어나왔다. 그건 할머니가 소심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자식에게 기대는 법이 없던 할머니는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열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노쇠한 몸이 됐다. 그래도 할머니는 여전히 꽃이 어여쁜 것을 알고,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꽃 속에서 소녀처럼 웃고, 그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러하듯이.

할머니가 나에게 “물 좀 갖다 다오”라고 했거나 “이것 좀 사다 다오”라고 했다면 그 말이 너무 일상적이라 아무런 느낌 없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할머니가 몇 차례 그런 말을 했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머니가 꽃밭으로 향하던 순간 그 작은 욕망이 터져 나온 순간을 오래 곱씹었다. 지탱할 것 없는 할머니의 걸음은 느리고 부자연스러웠지만 내 눈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방방 뛰듯 설레 보였다. 노란 유채꽃 사이에서 천천히 허리를 펴고 카메라를 바라보던 할머니. 나는 그 모습을 휴대전화뿐 아니라 가슴 한켠에도 꾹꾹 눌러 담았다.

할머니와 나는 우리 사이에 놓인 수십년의 세월만큼이나 교집합이 없다. 그러나 취향이 다르고 생활 양식이 다를지언정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감정까지 다를까. 새로운 광경을 보면 놀랍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진다. 영혼은 늙지 않는다. 몸이 먼저 지칠 뿐이다. ‘할머니니까’ ‘나이를 먹었으니까’ ‘이젠 늙었으니까’…. 이런 명제들 앞에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욕심을 내려놔야 했을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누군가의 손을 빌리는 시간이 늘수록 할머니는 점점 더 많은 것을 현실에 양보하고 타협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라도 할머니를 알아가고 싶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소한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고 싶다. 할머니가 아이처럼 웃고 소녀처럼 설레 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싶다. 밤새워 수다를 떨 수도, 힙한 가게에서 술잔을 기울일 수도, 직장 고민이나 연애사를 나눌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좋다. 우리가 친구가 될 시간이 아직은 오래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박상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