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에 거주하는 스콧은 2년 전 부모와 모든 연락을 끊었다. 인종 문제에 관한 말다툼이 발단이었다.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하던 중 어머니는 소셜미디어에서 인권 운동가를 지지한 스콧에게 화를 냈다. 스콧 옆에는 7살짜리 아들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 손자가 듣는 데서 어머니는 ‘정말 끔찍한 인종차별적 말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스콧은 “‘당신이 내 아이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부모로서의 감정이 매우 컸다”며 “그건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하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영국 BBC방송에 설명했다. 언쟁 이후 아버지는 스콧에게 이메일을 보내 어머니의 견해를 옹호하려 했다. 이메일에는 백인 우월주의 영상으로 연결되는 인터넷 링크가 첨부돼 있었다. 바로 그때 부모 자식 관계가 최후를 맞았다고 스콧은 말했다.
BBC는 “확실한 데이터가 부족하기는 해도 치료사,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부모와 자식 간 의도적 결별이 서구권에서 늘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소외(멀리함·estrangement)’라고 부른다.
호주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지난해 10월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성인들은 그들의 부모와 결별 중’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부모와 성인 자녀 간 소외가 증가하고 있다”며 이를 ‘세대 간 가족 기능장애의 소리 없는 전염병(silent epidemic)’이라고 비유했다. 2019년 9월에는 캐나다 월간지 ‘브로드뷰’가 ‘가족 간 소외라는 ‘조용한 전염병’’이라는 기사에서 같은 현상을 다뤘다.
칼 앤드루 필레머 미국 코넬대 인간개발학과 교수는 “‘가족 구성원과 (관계가) 끝났다’는 선언은 강력하고 뚜렷한 현상”이라고 BBC에 설명했다.
필레머 교수가 지난해 9월 저서 ‘단층선: 분열된 가족과 이를 수습하는 방법’ 출간에 앞서 실시한 전국 단위 조사에서 미국인 4명 중 1명(약 25%)이 다른 가족 구성원과 소원하다고 응답했다. 책에서 그는 “미국 성인 인구로 추정하면 약 6700만명”이라고 설명했다.
소외 당사자를 지원하는 영국 자선단체 ‘스탠드얼론(Stand Alone)’도 2014년 9월 시장조사기관 ‘입소스모리(Ipsos MORI)’를 통해 비슷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15세 이상 영국인 2082명에게 물은 당시 설문에서 자신이나 다른 가족이 연락을 끊었다는 응답자는 5명 중 1명꼴인 19%였다.
스탠드얼론은 그해 10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영국에서) 약 1200만명의 가족 구성원이 소외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며 “8%는 자신이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고 했는데 이는 적어도 500만명이 그러기로 선택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BBC는 “소셜미디어에는 (가족과) 결별하기로 한 성인 자녀들을 위한 온라인 지원 단체들이 늘고 있다”며 “스콧이 활동하는 한 단체는 회원이 수천명”이라고 전했다. 스콧은 “우리 단체 회원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그것(가족 간 소외 현상)이 점점 더 흔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장한 자녀가 부모와 결별하는 이유는 주로 어린 시절부터 겪은 정서적·언어적·신체적·성적 학대인 경우가 보통이었다. 부모의 이혼과 재혼도 빈번한 배경으로 꼽혔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콧 사례처럼 가치관 충돌로 부모 자식 사이가 틀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소외의 법칙: 성인 자녀는 왜 관계를 끊고 어떻게 갈등을 치유하는가’의 저자인 미국 심리학자 조슈아 콜먼 박사 등이 지난 10월 발표한 논문에선 자녀와 멀어진 어머니 3명 중 1명 이상이 ‘가치관 불일치’를 이유로 꼽았다. 필레머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동성애, 종교, 생활방식 같은 문제로 인한 갈등과 함께 가치관 차이를 소외의 주요인으로 강조했다. 이들은 최근 증폭된 정치적·문화적 양극화에 주목한다.
미 대선이 치러진 2016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중순까지 로이터통신이 미국인 642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는 선거 이후 가족 간 불화 사례가 늘었음을 보여준다. 정치 문제로 가족이나 친구와 언쟁을 벌였다는 응답자가 39%로 2016년 10월 조사 때보다 6% 포인트 증가했다. 13%는 ‘선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와 관계를 끊었다’고 답했다.
당시 로이터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정치적으로 분열된 양측 모두에 개인적 피해를 주고 있다”며 트럼프를 찍겠다는 남편과 헤어진 70대 여성 민주당원의 사례를 전했다. 2019년 10월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인 20명 중 1명 이상(6%)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대한 견해차로 가족과 결별하거나 대화를 중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브렉시트를 놓고 가족과 격론을 벌였다는 사람이 5명 중 1명 이상(22%)이었다.
콜먼 박사는 “이런 연구들은 우리가 누구를 가까이 둘지 놔줄지 선택할 때 정체성이 훨씬 더 큰 결정 요인이 됐다는 점을 부각한다”고 말했다.
가치관 차이로 서구권 가족을 갈라놓는 주제는 정치만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전면에 나선 ‘미투(MeToo)’부터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로 대변된 인종차별 철폐운동,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는 바이러스의 근원에 대한 음모론과 백신 접종에 대한 견해까지 거의 모든 사회문제가 가족 내 갈등 소재로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각국의 정치적 분열과 개인주의 확대와 맞물려 부모와 자식 간 결별 추세가 지속할 것으로 예상한다. 콜먼 박사는 “상황이 더 나빠지거나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본다”며 “가족관계는 의무나 책임을 강조하기보다 행복과 개인적 성장 추구에 훨씬 더 기반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가족 간 균열을 봉합하려는 노력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필레머 교수는 가족끼리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비무장지대’를 둘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부모가 인종차별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화해하지 않겠다는 스콧은 “쿨한 가족이 있다면 훌륭하겠지만 독성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