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친일파·독립운동가… 김가진의 진짜 얼굴은

입력 2021-12-02 20:33

내년 7월 4일이면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의 서거 100주년이 된다. 대동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국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항일 지하단체였다. 당시 김가진의 나이는 74세였다. 김가진은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냈고 77세에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동단으로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현재까지 83명이다. 항일운동 조직 중 최다 인원이다. 하지만 총재인 김가진에 대한 서훈은 25년간 7번이나 거부됐다. 대동단은 교과서도 다루지 않는다. 김가진의 친일 혐의 때문이다.

“김가진은 일제가 일방적으로 준 남작 작위를 명백하게 거부하는 표현을 그 즉시 하지 못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적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시를 써 준 것도 문제가 되었다. 또 고종 승하 이전까지 일제에 침묵했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 시찰 등도 있었다.”

김가진이 관찰사 시절 의병을 압송한 것도 서훈 거부의 주요 근거가 됐다. 과거 왕조 시대로 돌아가자는 ‘복벽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프레임도 작용했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인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은 이 책에서 김가진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명하며 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저자는 김가진이 고종의 최측근 외교관이자 조선의 주일공사였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관료 시절 김가진의 행적을 친일로만 볼 수 없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동농은 자신이 고종의 대일창구이며, 일제가 자신을 통해 고종의 행보를 재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가진의 인격은 내면 깊숙이 감춰졌다. 그것이 고종의 충신이자 외교관인 자신의 숙명이었다.”

저자는 또 “주일조선공사 김가진은 일본 외무대신이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계 고위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것은 고종의 밀명이기도 했다”며 “그가 작위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는 고종의 생명과 안위를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였다.

외교관으로서 고종을 도와 개혁과 독립을 추구했던 김가진은 고종 사후에 고령의 몸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까지 결행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내면서 “김가진이 독립운동가인가 아닌가는 독자들 판단에 맡긴다”고 밝혔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