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산업,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었나

입력 2021-11-25 20:38
러시아 우랄 남부에 위치한 마야크 플루토늄 공장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 가족의 1959년 성탄절 사진.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푸른역사 제공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으로 만든 유토피아를 뜻하는 ‘플루토피아’(Plutopia)란 조어는 SF소설의 제목처럼 보인다. 소설이 아니라면 어떻게 플루토늄에 유토피아란 말이 붙을 수 있을까. 하지만 플루토피아는 소설 속 얘기가 아니다. 미국 워싱턴주 동부의 리치랜드(Richland)와 러시아 우랄 남부의 오죠르스크(Ozersk). 1940년대 플루토늄 생산 공장이 처음 들어선 두 도시가 실제 플루토피아였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케이트 브라운 MIT대 교수는 두 도시에서 세계 최초의 플루토늄 공장이 어떻게 지어지고 운영됐으며 플루토피아를 왜 만들었는지 소설처럼 보여준다. 미국과 러시아에 있는 12개 이상의 문서고에서 비밀 해제된 핵무기 개발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당시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 인터뷰와 현장 답사를 추가했다.

“나는 노동자들을 플루토늄 생산과 관련된 위험과 희생에 동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미국과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플루토피아다.”

핵무기 복합체는 무기만 만든 게 아니었다. 저자는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공장 주변에 이상향에 가까운 도시 플루토피아를 지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은 복지도시이자 ‘핵가족’ 공동체였다. 핵무기를 만들 노동력을 유치하고 내부의 비밀을 유지하고 외부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1953년 미국 핸퍼드 플루토늄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기술자를 촬영한 것으로 당시 이들은 자신이 다루는 화학 물질에서 방사능이 나온다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푸른역사 제공

리치랜드에 들어선 핸퍼드 플루토늄 생산 공장은 1944년 가을 첫 번째 원자로를 가동했다. 여기서 만든 원자폭탄이 이듬해 일본에 투하됐다. 1950년대 초반 핸퍼드 공장 실험실에서 일했다는 여성은 당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상사들은 방사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실험실 기술자들은 방사능 용액을 맨손으로 측정하고 주입했다.

방사성 폐기물은 주변의 강으로, 대지로, 공기 중으로 흘려보냈다. 1955년에 작성된 월간 보고서를 보면, 11월에 연료 소자 폭발로 오염된 입자가 5제곱마일에 퍼졌다. 12월에는 한 원자로의 수조에 금이 가 하루 170만 갤런의 폐수가 컬럼비아강으로 유출됐다.

저자는 “리치랜드 근처의 핸퍼드 플루토늄 공장과 오죠르스크 옆의 마야크 공장은 40년 동안 가동되면서 각각 적어도 2억 퀴리의 방사능을 주변 환경으로 방출했는데, 이는 체르노빌 방사능의 두 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리치랜드는 고방사선 구역이었지만 미국 언론들이 ‘모범 도시’ ‘이상향’이라고 묘사한 신도시를 조성함으로써 노동자들을 끌어들였고 위험을 가렸다. 리치랜드는 동부의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누릴 수 있었던 수준의 주택, 학교, 상점 등을 갖춘 도시로 만들어졌다. 공장을 운영하는 듀폰 경영진은 중산층의 풍요로움으로 단합된 공동체만이 플루토늄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원자력 마을은 위험하고 폐쇄된 곳이 아니라 반짝이는 새로운 마을로, 원자력 노동자들은 아파트와 자가용을 소유한 부유한 중산층으로 대중에게 제시됐다.

미·소 냉전 속에서 소련도 1948년 6월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하며 ‘원자 방패’를 갖췄다. 그리고 미국이 리치랜드에서 했던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뒤따랐다. 공장을 짓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을 동원했고, 중저준위 폐기물을 인근 테차강에 바로 버렸다. 테차강 주변에는 41개의 정착지가 늘어서 있었고 12만4000명이 살았다.

레닌그라드에서 온 건축가팀이 설계한 “예쁘고 질서정연하며 재고가 잘 갖춰진 도시”도 조성했다. “1958년까지 오죠르스크의 모든 남성과 여성과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넓은 방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소련에서 놀라운 부유함의 징표였다.”

하지만 플루토피아는 정말 이상향이었을까. 1951년부터 58년까지 리치랜드의 태아 사망률은 전국 다른 곳보다 4배 높았다. 근처 목장에서 몰래 측정한 동물들의 갑상선은 허용치의 1000배 이상으로 피폭돼 있었다. 1957년 오죠르스크 공장에서는 지하 저장고에 보관돼 있던 고방사성 폐기물이 폭발했다. 폭발 3일 후 이 지역의 방사능은 허용 선량의 수백 배인 초당 4000∼6000마이크로뢴트겐으로 측정됐다.

두 도시는 풍요를 얻었지만 건강을 잃었다. 소비할 자유를 얻었지만 사실을 말하고 의문을 표출할 시민적 자유를 잃었다. 주민들이 가장 걱정한 건 건강이나 환경 문제가 아니라 일자리와 산업의 유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도시에선 수많은 건강·환경 문제가 제기됐고 관련 연구가 진행됐으며 손해배상 소송이 이어졌다. 책은 원자력 세력들이 이런 도전들을 어떻게 제압해왔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미국과 소련에 있는 두 플루토늄 도시의 역사를 통해 위험천만한 원자력산업이 어떻게 시작돼 유지됐는지, 원전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어떻게 잠재워지는지,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원자력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준다. 증거에 대한 부인, 비밀과 은폐, 여론 조작, 냉전적 국가주의, 원자력 복합체의 경제적 이익,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플루토피아 주민들의 지지 여론 등이 원자력을 떠받치는 힘이다. 저자가 만들어낸 플루토피아라는 단어는 원자력산업이 애초부터 여론 조작을 통해 시작됐으며 그게 아니면 유지가 불가능한 산업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두 도시에서 벌어진 일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일본의 원자력 개발자들은 가난하고 외진 해안 지역을 선택해 원자로를 건설했고, 원자력 마을에 보조금을 후하게 지급하는 관행을 차용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도 축소·은폐로 일관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어판을 위해 쓴 서문에서 북한에도 플루토피아가 존재할 가능성을 언급한다. “흥미롭게도 두 지도자들(김정일과 김정은)이 전혀 방문하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함경북도 길주군이다. 이곳에는 북한의 유일한 핵 실험장인 풍계리가 2018년 5월까지 존재했다.”

원전은 21세기에도 굳건하다. 핵무기 개발을 위해 시작된 원자력은 1950년대 ‘평화를 위한 원자력’으로, 이후 산업 수출 복지를 위한 수단으로 포장됐다. 지금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녹색에너지로 선전되고 있다.

‘플루토피아’는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우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플루토피아 주민들이 방사능 위험을 모른 척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풍요의 문명이 내재하고 있는 고도의 위험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된다. 환경 분야의 새 고전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