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오명 남긴 ‘정치 군인’… 퇴임 후 굴욕의 삶

입력 2021-11-24 04:06
육사 생도 시절 전두환(뒷줄 오른쪽 두 번째) 전 대통령과 노태우(뒷줄 맨 오른쪽) 전 대통령 등 11기 동기생들. 국민일보DB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치군인’이었다. 국가 최고 권력을 쥐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 대가로 퇴임 이후 여생을 감옥살이와 온갖 재판에 시달렸다. ‘독재자’ ‘학살자’라는 오명이 평생 따라다녔다.

전씨는 1931년 1월 경남 합천 율곡면에서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농부였다. 집안이 어려워 일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국비로 다닐 수 있는 육사에 51년 입학했다.

55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정치군인의 야욕을 드러내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 때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이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특전단장,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등 요직을 거쳤다.

전씨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던 1979년 11월 6일 10·26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을 발표하는 장면. 연합뉴스

전씨는 79년 10·26 사태가 발생한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박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했다. 그러고는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그는 80년 5월 신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며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낳았다.

전씨는 80년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뒤 군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 단독 출마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5공 독재 정권의 서막을 열었다.

80년 9월 1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씨가 선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피로 물든 최고 권력 자리는 평화롭지 못했다.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냈지만 민주화 시위가 폭발했다. 국민의 대통령 직선 개헌 요구에 87년 4·13 호헌조치로 맞불을 놓았다. 6월 민주항쟁으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명시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두환 시대’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83년 10월 9일에는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씨와 수행원들을 노린 북한 주도의 ‘아웅산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8년 12월 강원도 백담사에서 이순자씨가 외손녀를 업고 있는 국민일보 특종 사진. 국민일보DB

퇴임 후 그의 삶은 굴욕 그 자체였다. 여소야대 지형에서 5공 청산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퇴임 한 달 만에 동생 전경환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88년 11월 재임 기간 과오와 비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치자금 139억원과 개인재산 23억원 등을 헌납한 뒤 아내 이순자씨와 함께 강원도 백담사 유배 길에 올랐다.

89년 12월 31일 전씨가 국회 5공비리·광주특위 합동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발표문을 읽을 때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삿대질하며 “당신은 살인마야”라고 소리치는 장면. 연합뉴스

이후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과거사 청산 조치에 따라 거듭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95년 내란죄 혐의로 구속돼 2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96년 5·18 특별법에 따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이 확정된 뒤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추징금 납부를 거부했다. 또 회고록과 재판에서 광주의 진실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