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0일. 호우주의보 발효. 비선대 탐방로 점검, 위해목 제거작업. 수로 정비.”
“2010년 3월 2일. 생존자 김모씨. 실종자 정모씨, 이모씨. 김씨 등 3인 2월 27일 오전 5시 매표소 통과 후 설악골 입산. 3월 1일 비선대 방향으로 하산 중 눈사태로 2명 실종. 공룡능선 구조활동 중 생존자 만남.”
손경완(51) 국립공원산악안전교육원 과장이 꺼내 보인 작고 낡은 수첩에 적힌 기록들이다. 색이 바랜 수첩들 속엔 그가 국립공원공단 설악산사무소에서 10년간 레인저(국립공원을 보호·유지·관리하는 직원)로 활동한 기록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설악산 지도와 능선도, 사람들이 자주 찾는 등반 코스의 개념도도 붙어있었다.
tvN 드라마 ‘지리산’ 속 레인저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인 손 과장을 지난 19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공원공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레인저는 시설물 관리와 순찰, 구조활동, 자연자원 조사 등 다양한 업무를 한다. 산이 좋아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지만, 손 과장은 달랐다.
그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뒤 사진 관련 일을 하다가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서 풍경을 찍어보고 싶어 암벽등반을 배웠다”며 “그런데 정작 사진 일은 접고 산에서 일하게 됐다”며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민간구조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레인저가 된 건 아내 덕분이다. 그는 “아내가 ‘그렇게 산이 좋으면 제대로 배워서 해보라’고 하길래 2004년부터 등산학교에 가서 등반기술 등을 배우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몸으로 하는 건 남들보다 빨리 배우는 것 같다”고 돌이켰다.
드라마를 쓴 김은희 작가는 손 과장 등 여러 레인저를 취재했다. 손 과장의 수첩들도 드라마의 소재가 됐다. 그는 “처음 작가님을 만났을 때만 해도 정말 드라마가 만들어질까 반신반의했다”며 “드라마를 보니 예전에 구조활동하던 일이 생각나 울컥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일이 TV 화면에 나오니 오글거리기도 한다”고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들은 대부분 레인저가 경험한 ‘실제 상황’이다. 그는 “공감 가는 장면이 많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려질 줄 알았다면 숨겨진 이야기를 더 할 걸 그랬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급류에 휩쓸리는 장면 등의 컴퓨터그래픽(CG)이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실제는 훨씬 더 위험하다”면서 “그런 곳은 통제구역이라 시청자들이 실감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짚었다.
구조활동은 항상 어렵고 조심스럽다. 가슴 아픈 일도 많다. 실종자 시신을 발견하면 현장 보존을 위해 구조 헬기가 올 때까지 지키고 있어야 한다. 등반하면서 추락해 훼손이 심한 시신도 많다. 구조 중 시신을 접하거나 부상 내지 고립된 경험이 있는 레인저들이 트라우마로 일을 그만두기도 한다.
손 과장은 설악산 천화대의 암벽 등반 코스를 점검하다가 로프를 발견했을 때 일을 잊지 못한다. 로프를 따라 가보니 등반 중 추락사한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시신을 인계할 때까지 현장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사망자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전화 배터리가 남아있었다. 손 과장은 “가족들이 찾는 전화였는데 그걸 받아서 상황을 이야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며 “밤새 그 전화벨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종자를 구조하다가 함께 고립되는 일도 있다. 손 과장도 설악산 황철봉 출입금지구역에서 조난한 사람을 구하러 갔다가 비가 오고 안개가 심해 하룻밤을 새우고 내려온 적이 있다. 부상 위험은 늘 따라다닌다. 손 과장은 “출입금지구역에 단속 활동을 갔다가 절벽에서 추락했는데 절벽 가운데 있던 나무를 양손으로 움켜잡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며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트라우마가 남아 회복하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털어놨다.
산불 진압 작업에도 여러 번 나섰다. 2005년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화재 때도 현장에 있었다.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탔지만 홍연암이 화재를 피한 데는 손 과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낙산사 외곽에서 불길을 진압하던 중 홍연암 처마에 불이 붙는 걸 봤다”면서 “불붙은 구조물을 신속히 뜯어내 더 큰 피해를 막았다”고 했다.
손 과장은 2015년부터 서울 도봉산국립공원 교육원에서 교육 업무를 맡고 있다. 구조활동을 하면서 무릎 어깨 등을 다쳐 예전처럼 현장을 누비긴 어렵지만, 설악산에서 많은 사람을 구해낸 일은 큰 자부심으로 남았다.
그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은 내게 무엇보다 큰 자산”이라며 “돌아보면 유독 고맙다는 얘길 많이 듣고 살았다. 몸은 망가졌어도 후회는 없다. 인생 잘 살았구나 싶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