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면 호들갑이 는다. 특히 해외에 나가면 곱절은 사교적이 된다. 평소보다 표정도 많아지고 목소리도 높아지고 제스처와 감탄사가 늘어난다. 영어를 씀과 동시에 약간 미국인처럼 변하는 느낌이다. 그런 외향인의 가면을 쓴 내가 포르투갈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여행 책에서 본 ‘서핑의 성지’라는 문구에 끌려 ‘이리세이라’라는 해안가 소도시를 찾았다.
당시 나는 서핑의 시옷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서핑의 성지라는 말에 막연하게 아름다운 해변을 떠올렸다. 유순한 파도가 잔잔하게 백사장을 쓰다듬고, 수심은 가도 가도 정강이 정도에서 더 깊어지지 않는 그런 바다 말이다. 서핑을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착각인지. 얕고 파도가 없는 바다는 서핑의 성지가 아니라 서핑의 지옥 아닌가. 이리세이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나를 데리러 온 게스트 하우스 주인을 만났다. 그는 나와 함께, 20대 미국 여성 둘을 차에 태웠다. 숙소로 이동하며 드디어 이리세이라의 바다를 보게 되었다. 상상했던 잔잔한 옥빛 바다는 간데없고 무채색의 파도가 사납게 일렁이는 바다가 이어졌다. 대양의 거대한 잿빛 손아귀가 둥둥 떠 있는 서퍼들을 한 움큼 훑어갔다 거칠게 풀어놓고 있었다. 해운대의 파도가 발라드라면 이것은 헤비메탈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서핑의 성지라 함은 파도가 거칠다는 의미였다. 포효하는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에게 미국인들이 말을 걸었다. “당신도 서퍼인가?” “당연하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곳이 휴양지인 줄 알고 밀짚모자를 쓰고 잘못 찾아온 사람이었다. 시무룩하게 “아니, 난 그냥 투어리스트야” 하고 대꾸했다. 그들은 미국인다운 친근함으로 방긋 웃으며 본인들은 서퍼라고, 너도 여기에서 서핑을 시작해보면 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풀장에서도 겁먹는 사람으로서 저 야수 같은 바다에 몸을 던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자동차는 바닷바람처럼 달려 우리를 숙소로 데리고 갔다. 숙소 주인은 2층으로 우리를 인솔했다. 늘어선 방 문 중 하나를 열며 “이건 너의 방!”이라고 내 눈 앞에 열쇠를 짤랑이는 그의 태도가 짐짓 우쭐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그 당당함이 이해가 갔다. 나의 방 정면에 있는 커다란 창을 북대서양이 꽉 채우고 있었다. 몰아치는 회색 파도가 유리를 두드릴 듯 가까웠다. 오싹할 만큼 멋진 광경이었다. 나는 감탄한 표정으로 “방이 무척 좋네요. 특히 전망이 훌륭하네요!”하고 그에게 엄지를 치켜 올려 보여줬다. 그는 싱긋 웃긴 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덜 행복해 보였다. 왜지? 갸웃하는 나를 남겨두고 그는 미국인 둘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그가 문을 열며 “이건 너희들의 방!”이라고 말하자 열린 문 너머로 발을 구르는 소리와 고주파 사운드가 동시에 들렸다. 그레이트, 어메이징, 판타스틱, 러블리, 퍼펙트 등등 세상 모든 감탄 표현이 로켓처럼 발사됐고, 여기에 와서 너무나 행복하다, 이런 경험을 선사해줘서 고맙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방문을 나서는 집주인의 얼굴에서 ‘암, 이 정도 반응은 나와줘야지’ 하는 뿌듯함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에겐 내 반응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보여준 반응은 진수성찬을 차려 줬는데 “먹을만하네요”라고 한 정도였다. 하지만 나 역시 이 방에 무척 만족하고, 이 광경에 압도되었는데! 내 마음을 담기에 영어가 어색해서 그랬을까? 하지만 나에게 한국말로 표현할 기회를 준다고 해도 “헐, 대박!”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속사포처럼 내뱉던 극찬의 말들은 어쩐지 입에 올리기 머쓱했다. 계속 이어지는 옆방 손님들의 흥분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여행지에선 나도 한 호들갑 하는 사람이었거늘, 특히 영어를 장착하면 나에게도 미국인적 감성이 깃든다 생각했거늘, 어떤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열없고 점잖았다. 제아무리 여행 인격을 덮어써도 말이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