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그래도 유승민이 있었기에

입력 2021-11-18 04:03

한국과 미국의 민주당 지지 세력엔 공통점이 있다. ‘지식인 프라이드’다.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낀다는 정치 심리학적 논리다.

최근 만난 국민의힘 수도권 의원이 전한 얘기다.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자신의 선거구로 옮겨오면서 지역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단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 오히려 자신에 대한 공기가 거칠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예전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손가락 욕설’을 하는 사람도 생겼다. 부동산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 국민의힘에 여전히 적대적인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한국 유권자들이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데 있어 경제적 상황이 최대 변수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가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다르다. 미국은 애국심이고, 한국 은 분노다. 지금 국민의힘을 지탱하는 힘은 문재인정부에 대한 울분이다. 미국이 해외에서 전쟁을 할 경우 보수는 애국심을 외치고, 진보는 반전 집회에 나선다. 미국 보수의 애국심은 허황된 게 아니다. 미국 학부모들이 자녀가 합격했을 때 ‘웃다가 우는’ 대학이 있다.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자녀가 졸업 후 전장에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브라운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9·11테러 이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으로 숨진 미군은 2019년 말 기준으로 7057명이다. 군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그런 군인들을 애국심으로 떠받치는 게 미국 보수다. 미국에서 인기 있는 미식축구팀의 이름이 ‘뉴잉글랜드 애국자들(patriots)’인 것은 ‘애국’이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얼마나 보편적으로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한국에서 애국을 잘못 꺼냈다가는 ‘태극기 부대’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한국 보수는 궤멸 수준의 파괴를 당했다. 2017년 6월 30일 한국갤럽이 공개한 여론조사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당시 지지율은 80%였고,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지지율은 7%에 불과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그가 표현했던 ‘죽음의 계곡’ 시기를 버텼다. 그리고 개혁 보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도 보수층은 유승민을 보고 보수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계도 뚜렷했다. “탄핵은 정당했지만, 박근혜에 대해 안타까움이 있다”는 ‘양다리’ 발언을 반복하면서 중도층은 놓치고, 보수층은 돌아오지 않는 자책골을 범했다. 당내 기반도 탄탄하지 못했다. 한 전직 의원은 “유승민을 위해 싸운 적이 있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듣지 못했다”면서 “유승민은 다른 의원들이 자신을 돕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합리적으로 보이면서도 고집 센 그를 향해 나온 말이 ‘대구 귀족’ ‘남자 박근혜’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국 보수는 유승민에게 빚을 졌다. 꼰대와 구악들로 가득 찬 것으로 보였던 새누리당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그의 소신은 빛났다. 유승민의 의원 시절,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야구공이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근무했을 때 직장인 야구 경기에서 홈런을 쳤던 공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유승민이 기대했던 역전 홈런은 터지지 않았다. 그는 승리 투수도 아니었고, 마무리 투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승민은 한국 보수가 무너졌을 때 마운드를 묵묵히 지켰던 중간계투 투수였다. 국민의힘이 이 정도까지 일어서는 데 그의 공이 적지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빨갱이’가 아니었듯이, 유승민에게 튄 ‘배신자’ 얼룩은 이제 말끔히 지워야 한다.

하윤해 정치부장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