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생명 싸개 속의 시간들

입력 2021-11-18 03:03

어느새 찬바람이 불고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이 됐다. 수확을 기대하는 때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수확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수확에 비해 매출이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다. 기쁨은 크지 않을 수 있다. 공들였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도 부지기수다. 코로나의 무게가 만들어 놓은 불투명한 시간 때문에 감사보다는 미래에 대한 절망과 염려가 더 깊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지금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고군분투하는 다윗처럼 말이다.

사울 때문에 광야를 떠돌며 고생하던 시절, 다윗은 나발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발의 종들에게 도움을 준 적 있던 다윗은, 부하들을 나발에게 보내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신의 어려움을 덜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사악한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분노한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나발의 집을 진멸하고자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은 음식을 장만하여 다윗에게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분노를 멈추고 집안을 풍비박산 내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호소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아닌가!

아비가일은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 25:29)고 말한다. 원수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지라도 다윗은 여호와의 보호 속에서 언제나 안전할 것이라는 말이다. ‘생명 싸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번들(bundle·꾸러미)로 묶다’는 뜻이다. ‘1+1’과 같이 하나로 묶인 상태로, 하나님과 다윗의 견고한 연합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의 보자기’라는 아름다운 말을 쓴 것은 더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과 함께 묶여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나발의 도움이 없어서 당장에 굶주릴지라도, 사울의 추격으로 위협을 느낄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묶여있다면, 하나님의 생명 싸개 안에 있다면, 언제나 안전하다. 더욱이 아비가일은 여호와가 다윗의 적들을 물매로 던질 것이라는 말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골리앗을 물리칠 때를 상기시킨다.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다윗의 믿음이 드러난 그 처음, 아비가일은 그 처음을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따를 때의 그 다윗을 기억하게 한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싸개 속에서 지내온 다윗의 세월을 소환한다. 다윗이 언제는 나발의 떡으로 살았던가! 아비가일의 지혜는 다윗이 무엇으로 살았는지, 다윗의 생명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려준다. 결국 다윗은 분노를 멈추었다.

코로나는 우리를 다윗의 그 광야와 나발의 그 난폭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예기치 않았던 시간이었다. 이 불가항력적 위험들은 앞으로의 시간에도 불안감을 드리운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보고 의지할 것은, 이 모든 위험과 불안 속에서 우리를 자신과 ‘1+1’으로 묶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생명 싸개 안에 우리를 숨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만족할 만한 성과도 없고 미래도 보장돼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오늘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버티고 견딘 하루하루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맞이한 오늘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통과 불안이 은혜와 사랑을 덮을 수는 없다.

김호경 교수(서울장로회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