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쓴 편지가 126년 만에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일본의 만행이 여러 통의 편지에 자세히 담겨져 있다는 점을 들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16일 을미사변 당시 주조선 일본대사관 영사관보로 근무하던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8통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당시 니카타에 살던 친구 타케이시 사다마츠에게 1894년 11월부터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까지 8통에 걸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대사관 생활을 전했다.
특히 을미사변 다음날에 쓰여진 6번째 편지에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의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호리구치는 “(내 임무는) 진입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담을 넘고 어전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면서 “생각 외로 용이해서 오히려 어안이 벙벙하다”고 회상했다.
학계의 가설을 뒤집는 내용도 나왔다. 사건 전날인 10월 7일에 쓰여진 5번째 편지에서는 명성황후의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받은 편지함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호리구치는 “흥선대원군이 쓴 한시가 한 구절 있는데 뜻을 알기가 어렵다”면서도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제일의 노(老) 영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한시를 직접 분석한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선생은 “흥선대원군은 이 시에서 자신은 (사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면서 “(흥선대원군이) 일본을 사주해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완전히 부정됐다”고 말했다. 호라구치는 1930년대 수필을 통해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 대항하기 위한) 궐기를 결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편지는 우표 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77)씨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고향 나고야의 한 고물시장에서 편지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붓으로 흘려 쓴 글씨는 을미사변을 연구해 온 김 선생이 판독했다. 그는 “사건 세부 내용이나 가족에 관한 기술이 일치해 진필이 틀림없다”면서 “현직 외교관이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는 내용을 직접 적은 편지에 충격을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의 지휘로 군인과 외교관, 낭인들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불평등조약이던 조 일수호조약에 의해 시해에 참가한 육군 장교 8명 등은 다음해 재판에서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 받았다.
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