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약자 돕기 위해서라면
포퓰리즘 불사한다는 이 후보
소외 계층 지원 위한 적극적
복지정책 의미하는지 불분명
전 국민 재난지원금·기본소득
어떻게 가능한지 더 설명해야
포퓰리즘 불사한다는 이 후보
소외 계층 지원 위한 적극적
복지정책 의미하는지 불분명
전 국민 재난지원금·기본소득
어떻게 가능한지 더 설명해야
우리나라에서 포퓰리즘은 매우 부정적인 단어다. 어느 후보의 선거 공약이 포퓰리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군더더기 없는 효과적인 공격이다. 포퓰리즘이 제정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지식인들)가 시작한 ‘브 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에서 기원했다거나, 남북전쟁 후 극심하게 분열된 미국에서 경제적 평등을 주창한 대중 운동이었다는 식의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대중영합주의의 영어 표현은 포퓰러리즘(popularism)이지만 아무도 그런 구분에 신경 쓰지 않는다. 포퓰리즘에는 인기를 끌기 위해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부를 탐한다,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합당치 않은 선물을 준다는 뜻이 들어있다. 선물의 대가는 권력의 원천인 표다. 돈으로 표를 산다는 불법성까지 내포한 위험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최근 발언은 놀랍다. 그는 “희망 없는 청년을 구하기 위해 포퓰리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병하다 돈이 없어 숨지게 한 대구의 청년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모든 경쟁 후보가 끊임없이 이 후보를 ‘얄팍한 현금 살포 포퓰리스트’라고 비난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이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모를 리 없는 이 후보가 이렇게 나섰다. 이 후보의 정치적 셈법이 무엇이었는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한 보도가 수차례 나왔고, 공감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친일파, 빨갱이처럼 무작정 들이대는 낙인찍기 대신 포퓰리즘이라고 비난받는 정책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효과와 부작용이 있는지 따져보자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성공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들어봐야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10년 전인 2011년에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무상급식 논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포퓰리즘이다. 돌이켜보면 무상급식 논쟁은 ‘보편적 복지 대 선택적 복지’라는 보수·진보 진영의 기본적인 노선 싸움이었다. 나라를 어떻게 경영할지를 놓고 고민한 결과를 서로 가늠하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이 다수였던 서울시의회가 무상급식 조례를 강행 처리한 뒤 서울시장의 공포 거부, 시의회 의장의 직권 공포를 거쳐 소송전으로 격화되면서 합리적인 정책 논쟁은 ‘퍼주기 포퓰리즘’을 앞세운 정치 공방으로 변질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유럽과 남미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기세를 올린 탓도 있었을 것이다. 죽은 지 30년이 넘은 아르헨티나 페론 대통령이 빠짐없이 거론됐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빨갱이 포퓰리즘’이라는 구호까지 난무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제안한 주민투표가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면서 논란은 허무하게 끝났지만 낙인찍기 공방의 최전선에 동원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선을 4개월 앞두고 10년 전 포퓰리즘 공방이 재연되고 있다. 물론 그때와 여건은 많이 다르다. 많은 국민이 보편적 복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전국적인 초·중등학교 무상급식에 고교 무상교육까지 정착했다. 코로나19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정부가 능력만 있으면 국민에게 현금을 지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헬리콥터 머니’는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한정 찍어내는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우리도 자연스럽게 결혼·출산 지원금을 받아 쓴다. 기득권 세력의 엘리트주의에 대항해 경제적으로 소외돼 고통 받는 사람을 돕는 적극적 복지정책을 ‘좋은 포퓰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후보가 “기꺼이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인식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후보는 흔히 쓰이는 나쁜 뜻으로서의 포퓰리스트는 아닌 것일까. 개인적으로 지금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과문한 탓이지만 모든 국민에게 25만~30만원씩 또 나눠주겠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국토보유세를 신설하고, 그 돈으로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이 어떻게 국민 90%를 위하는 길인지도 잘 모르겠다. 돈을 주겠다니 나쁠 것은 없는데, 자세한 설명 없이 무작정 따라오라고 하니 진짜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건지 믿기 어렵다. 다짜고짜 포퓰리즘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주장은 싸구려 정치선동이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모두 정상은 아니다. 소리만 지르지 말고 조금 더 조용하게 설명해 주면 좋겠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