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精談] ‘반차’가 뭐라고!

입력 2021-11-17 04:05

“내가 꼰대인 걸까?” 최근 사업 확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친한 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앞뒤 다 자르고 대뜸 말을 뗀 그녀의 사정은 이랬다. 그녀는 꽤 큰 규모의 홍보대행사를 운영하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베테랑이다. 하지만 그녀는 요즘 당황스럽기만 하다. 예전에 비해 직원 수는 줄었지만 소통은 더욱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인지라 작은 조직이고, 그럴수록 멀티 플레이어가 간절히 필요했는데, 다행히 지인들이 업계 ‘선수’라며 추천해 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새로 합류한 직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잘 알려진 외국계 회사 마케팅 팀장도 있었고, 스타트업 회사에서 함께 조직을 키워가는 도전을 하고 싶어 언론사에서 이직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업무회의 때마다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한 가지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중요한 협력사와 업무회의가 있었단다. 다른 일정과 겹쳐 도저히 참석을 못 하게 돼서 고민 끝에 직원만 보냈다. 그런데 오후 2시 회의에 맞춰 나간 직원들은 6시가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결국 직원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회의 끝나면 연락줘요.’ 또 한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야 울리는 까똑. ‘회의 잘 끝내고 5시경에 바로 퇴근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니, 이건 뭐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중요한 회의여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또 한참이나 지나서 까똑. ‘그러시면 집에 가서 회의 결과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나도 그녀와 함께 동시에 외쳤다. ‘아니, 전화로 먼저 간략하게라도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뒤로도 우리가 함께 느끼는 꼰대의 징조라며, 그래서 ‘90년생이 온다’를 읽어야 한다며, 그래도 중요한 업무보고는 구두로 해 달라고 말하고 살자며, 그래야 화병 걸리지 않는다며 그녀를 위로했다. “언니, 우리 꼰대 맞아. 그래도 세상엔 두 가지 꼰대가 있다더라. 자기가 꼰대인 걸 아는 꼰대와 모르는 꼰대. 우린 자각이라도 하고 있으니 경증이야.”

하지만 며칠 뒤 나도 꼰대의 갈림길에서 헤맬 줄이야. 11월 말에 계약이 끝나는 직원이 퇴사 3주를 앞둔 주말, 결혼식 청첩장을 돌렸다. 사내규정상 결혼 유급휴가는 5일. 하지만 그 팀원이 담당한 사업 중 하나인 외부 공모전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고, 마감과 심사 등 모든 일정이 겹쳐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결혼식이 있는 주말에 집안일이 겹쳐 참석을 못 하게 돼 따로 축의금 봉투도 챙기고, 부재중에 진행될 공모전 업무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말을 건네려던 참에 사내 네트워크 메신저 창에 불이 들어온다.

‘팀장님, 토요일이 결혼식이라서 금요일에 하루 연차 낼게요. 그다음 주 금요일에 출근해야 하는데 오전엔 반차 내고, 오후엔 문화day 신청해서 커피 페스티벌 다녀오겠습니다.’ 이 두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한참이나 모니터를 노려봤다. 팀원의 말인즉슨 10일 후에 회사를 나올 테고, 마지막 한 주 출근하고 퇴사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결혼식 하루 전에 휴가 내서 푹 쉬고, 예쁘게 웨딩드레스 입고 입장하기를 나도 진심으로 바랐다. 한 달에 한 번, 문화생활을 권장하기 위해 반나절 정도 자유 시간을 주는 ‘문화day’도 활용해야지. 하지만 문제는 그 ‘반차’였다. 반차가 뭐라고.

‘나 때는 말이야’, 긴 시간 자리를 비웠으니 신행휴가 끝난 금요일 오전엔 잠깐 출근해 공모전 결과를 살펴봤을 테고, 자리 비운 동안 업무를 도와준 팀원들에게 제주 하르방 초콜릿이라도 돌렸을 텐데. 이런 마음이 동시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결국 난 커피 한잔을 나누고 축하한다며 봉투를 건네는 것까지만 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한 문장. 정문정 작가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서 이렇게 말했지.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 능력의 문제다.’ 이 책을 언니의 회사 직원에게 그리고 우리 팀원에게 선물해줄까?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