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드린 세 번의 중보기도가 나온다. 그 중 첫 번째 기도가 오늘 본문 말씀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모든 성도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은혜로 신분이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죄인의 습관을 지니고 있다.
마치 반역으로 아기 때 버려져 거지로 살던 왕자가 수십 년이 지나 왕으로 복권되었지만, 거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왕자가 계속해서 거지로서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겠는가. 왕자로 다시 부르신 왕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불러내어 건지셨다. 그런데 여전히 옛사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떨까.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그 구원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에 아무 관심도 없다면 어떨까. 이것은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포함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대속에 합당한 자로 성장,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예수님의 기대를 알고 있었다. 바울의 기도 속에 담긴 예수님의 기대를 생각하며 우리도 십자가 희생과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한 자로 성장, 변화되는 것을 사모하며 더욱 간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모든 선을 기뻐하기를 그리고 그 선한 것을 믿음의 역사를 통해 능력으로 성취하기를 기도한다. 구원받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가 이제 끝 날이 곧 오니 가진 돈 마음껏 써보자면서 향락과 사치라는 악에 빠지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이와 같은 태도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종종 매스컴을 통하여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쾌락을 즐기고 분노 속에 모든 것을 부숴 버리겠다는 답변을 듣곤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으로 선을 기뻐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내일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속한 악(요일 2:16)이 아니라 모든 선을 기뻐하라. 악으로 기우는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새로워진 새 사람의 마음으로 선을 선택하라.
이것이 그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선을 기뻐함으로 악을 넉넉히 이기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기대를 충족하는 우리의 삶의 열매임을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성도들을 통해 높아지고, 이러한 성도들 역시 예수님의 영광 안에 거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수백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은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며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되었지만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이방신 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또 과거 한국 교회 역시 선명한 부흥을 경험했음에도 신사참배에 거리낌 없이 동참함으로 그 영광을 잃어버린 바 있다.
이와 같은 당시 만연하던 불신앙의 풍조 속에 도전을 주는 모습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신사참배에 용감히 반대하며 믿음을 지켰던 우리의 선진들처럼, 다수의 사람이 당연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것에 반대하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다.
예수님은 그의 영광을 알고 그 영광 안에 살아가는 이 시대의 참 그리스도인을 기대하고 있지 않겠는가. 점점 세속화되는 이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는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기억하며 먹고 마시고 앉고 서는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기 원한다. 그리고 그런 삶에 풍성히 넘치는 진정한 생명을 맛보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한다.
윤창재 미국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