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육상부에 들어가고 싶었다. 달리는 건 다 좋았는데 “굳이 따지자면 100m 단거리”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닌 초등학교에는 육상부가 없었다. ‘뺑뺑이’로 결정된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기필코 육상부에 들어가고자 고등학교는 위례정보산업고(현 서울동산고)에 진학했는데 하필 1991년 그해 육상부가 폐지됐다.
억울한 마음에 담임교사를 찾아가 ‘육상부 때문에 이 학교에 왔는데 어떡하냐’고 따졌다. 담임교사는 대신 “여자축구부가 올해 새로 생기는데 거기 응시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게 소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꿨다. ‘여자축구 1세대’인 그는 한국 여자축구 사상 첫 월드컵 진출을 이끌었다. 은퇴 후인 2010년에 열린 여자 U-20 월드컵에선 대표팀 코치로서 한국이 3위에 오르는 데 기여했고, 2019년 말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지난 9일 마침내 한국 축구계의 ‘유리천장’을 깨고 여자 U-20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다. 황인선 신임 감독의 이야기다.
황 감독은 14일 국민일보와 전화인터뷰에서 “솔직히 여자들에게 감독 자리를 줄지 생각 못 했는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며 “1세대 언니로서 후배 지도자들에게 길을 조금 열어준 것 같아 기분 좋지만, 부담감도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국내 학교 여자축구팀이나 실업팀에는 여성 감독이 일부 있지만, 각급 대표팀에서 여자 감독은 그가 처음이다.
지도자로서 스스로 생각하는 강점은 ‘소통 능력’이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다”면서도 “대신 선수들이 언니처럼 편하게 대하고 스태프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데는 저 같은 스타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소 혼자 산책하길 좋아하고, 시인 류시화와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즐겨 읽는 등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하지만 축구장에만 서면 달라진다. 선수 시절 코치들과 미니 게임에서도 편파판정이 있으면 곧잘 목소리 높이곤 했다. 황 감독은 “운동할 때는 조금 성질이 더럽달까”라고 웃으며 “지는 게 너무 싫다”고 말했다.
그런 황 감독이 중시하는 건 ‘공격 축구’다. 그는 “축구는 공격”이라며 “골이 많이 나와야 축구가 재미있고 팬들도 즐거워한다. 선수 때도 공격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 공격본능이 한국 여자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2003년 6월 일본과 아시아축구선수권 3·4위 전에서 황 감독의 결승골로 한국은 1대 0 승리를 거뒀다. 사상 첫 여자 월드컵 본선 직행 티켓을 선사한 골이었다.
그는 “골대 앞으로 크로스가 올라왔어요. 공격수한테 날아간 거니까 미드필더인 저는 세컨드볼을 기다리면서 위치를 잡아야죠. 근데 이상하게 골문으로 뛰어가고 싶었어요. 한 명이 퇴장당해 10명이 뛰어서 엄청 힘들었는데도 무작정 뛰었죠”라고 말했다. 송주희가 올린 크로스가 일본 수비수 몸을 맞고 흘러나오자 뛰어 들어오던 황 감독이 그대로 차 골망을 흔들었다.
감독으로서 눈앞의 과제는 내년 8월 코스타리카에서 열리는 여자 U-20 월드컵이다. 목표는 우승이다. 2010년 독일 대회에선 코치로서 3위의 영광을 함께 누렸다. 그는 “어느 대회든 3등, 4등 한다는 건 지도자로서 할 말이 아니다”라며 “축구는 정답이 없고 누가 우승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목표는 늘 우승으로 잡고 매 경기를 결승전이라 생각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를 위해 앞으로 함께할 선수들에게는 U-20 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소속감을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황 감독은 “2010년 U-20 3위, U-17 우승을 하면서 여자축구 붐이 일었다. 당시 주요 멤버였던 지소연 장슬기 등이 현재 A대표팀을 이끌며 버팀목이 됐다”면서 “코로나19로 합숙이나 대회를 많이 치르지 못해 팀 의식이 흐려졌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팀임을 먼저 알려주고 싶다. 우리 팀이 왜 중요하고 월드컵에서 왜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지도 알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여성 축구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실제 축구를 배우는 여성도 많아지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내비쳤다.
황 감독은 “여성이 축구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축구인으로선 정말 좋은 일”이라며 “이런 분위기가 좀 더 퍼져서 축구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고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축구의 묘미를 즐기고 한국 여성 축구 저변도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