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화고 학생들, 교복을 벗는 순간 김용균이 된다”

입력 2021-11-15 00:04
전국 특성화고 재학·졸업생들이 현장실습 중 숨진 고(故) 홍정운군을 추모하는 집회를 지난 7일 열고, 세종대로를 행진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2017년 제주의 한 생수 공장에서 현장실습 도중 숨진 고(故)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는 14일 “후회가 밀려온다”고 말했다. 이씨는 “작년까지 특성화고 제도를 개선해 달라고 줄곧 얘기해 오다 올해는 얘기하지 못했는데 공교롭게 정운군 사고가 터졌다”며 “민호가 그렇게 되고 제도 개선 움직임이 있었지만 적용되지 않은 현장이 있던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국민일보는 특성화고(직업계고) 재학생뿐 아니라 학교 졸업 뒤에도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에 내몰리는 문제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 교육당국 관계자를 비롯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들은 노동 현장의 안전장치를 강화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등 특성화고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안전 또 안전

고졸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영세 사업체일수록 안전한 작업 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관리 감독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연미림 민주노총 청년사업실장은 “교복을 입으면 홍정운이고, 벗으면 김용균인 게 지금의 현실”이라며 “현장실습생은 노동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없애주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특성화고에 재학 중이던 홍정운군은 지난달 6일 여수의 한 요트 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바다에서 숨졌고, 김용균씨는 2018년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혼자 작업하던 도중 사망했다.

서울의 한 특성화고 교장을 지낸 이조복 서울시교육청 진로직업교육과장은 “현장실습을 나가기 전 안전 조치를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홍군 사고 이후 서울 1300개 사업장을 전수조사했고, 2곳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학생을 곧바로 복귀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노동인권교육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뒤잇는다. 특성화고 학생을 대상으로 7년간 안전교육을 해온 이철갑 조선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학생들은 방치되듯 현장에 보내지고, 사고가 난 뒤에야 관심의 대상이 된다”며 “실습 직전에 받는 교육이 아니라 정규과목으로 노동 안전을 가르쳐야 학생들이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 등 교육시민단체들은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추가하는 등 정규과목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 과장은 “교육청 차원에서 순회 지도를 할 때마다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다”며 “기업에 대해 막강한 힘을 가진 고용노동부가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은 일터를 꿈꾸며

교육 현장에 있는 학생들은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겨나 사회에 안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고졸 노동자로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2020년 직업계고 정책소통단 결과보고 자료집’에 따르면 전국 특성화고·마이스터고 재학생 1322명 중 취업한 489명에게 취업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답한 학생이 9%에 그쳤다. ‘대학 진학은 나중에 하려고’(28%), ‘빠르게 경력 쌓고 싶어서’(20%), ‘경제적 이유’(19%)가 더 큰 이유를 차지했다. 진학 대신 취업을 택하지만, 일자리의 질이 좋아 택한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정부 지원책도 고졸취업지원센터 설치 요구(46.5%)와 공무원·공공기관·공기업 등 고졸 취업 비율 확대(45.7%)에 집중됐다. 좋은 일자리를 선별해 연결해줄 수 있는 지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고졸취업지원센터는 졸업 후 다른 직장을 알아보거나 진로를 재탐색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학생 때는 그나마 학교의 도움을 받지만, 졸업 후에는 이마저도 없기 때문이다. 범정부 청년정책 컨트롤타워인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민간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승윤 중앙대 교수는 “졸업 후에 직무교육을 더 받을 수 있고 다른 기술도 배울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며 “원한다면 대학에 진학해 추가 교육도 받을 수 있도록 생애주기 경로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현장실습을 통해 미리 기업체의 직무를 체험하고 진로를 탐색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성화고 본연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의 한 특성화고 교장은 “특성화고는 현장 투입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라며 “특성화고의 실습교육 장점을 활용해서 좋은 직장을 잡고 ‘실력 중심사회’를 보여주려 애쓰는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고졸 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서울의 또 다른 특성화고 교장은 “고졸 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학교 혼자 풀기 어려운 문제”라며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업체를 교육하고, 고졸 출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육계는 안전한 노동 환경이 담보되면 특성화고의 사회적 역할도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교육시민단체 ‘민주주의학교’ 상임대표인 송주명 한신대 교수는 “모든 학생이 꼭 대학에 갈 필요는 없기에 특성화고는 학생들이 진로를 조기에 설정하고, 새로운 직업 활동에 먼저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며 “공공일자리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의 전공과 연계된 안정적인 민간 일자리를 파악해 졸업 후에도 취업을 적극적으로 알선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장군 전성필 김판 기자 general@kmib.co.kr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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