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정취와 현대미술을 함께 맛보고 싶다면 서울 중구 덕수궁은 어떨까.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와 함께하는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올해 네 번째인 이 프로젝트를 맡은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정원’을 매개로 덕수궁의 역사를 돌아보고 동시대 정원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전시를 꾸몄다. 현대미술가뿐 아니라 조경가, 애니메이터,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 무형문화재 등 다양한 분야와 세대를 아울러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권혜원의 영상작업은 몇백년 전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덕수궁 터에서 정원을 가꾼 가상의 정원사 5인을 등장시켜 정원이야기를 풀어낸다. 각기 다른 시대를 보낸 정원사들의 대화뿐 아니라 식물들의 시선이 겹쳐 새로운 느낌을 준다.
지니서는 1911년 석조전 앞 대정원이 조성되며 중화전 행각이 훼손된 장소에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줄커튼 같은 작품이 바람에 흔들리며 과거와 대화하라고 손짓한다.
장승범은 장생불사의 상징인 사슴을 괴석과 함께 올려놓았는데, 사슴의 뿔에서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낯익으면서도 낯선 광경을 만들어낸다.
미디어아티스트 이예승은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해 혼종적인 덕수궁에 21세기 가상의 정원을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채화(彩華) 작품이다. 조선의 조화(造花)인 채화는 궁중공예의 정수로 섬세함과 우아함이 놀랍다. 비단 모시 밀랍 송화 등으로 만든 채화는 왕조의 불멸을 염원해 만들어진 시들지 않는 꽃으로 생명존중 사상이 담겨있다. 고종 즉위 40주년을 경축한 진연(進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채화는 통상 상에 올려놓지만 궁중채화 중요무형문화재 황수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설치작품처럼 천장에 매달아 공예와 순수 미술의 경계를 흔든다.
조경가가 만든 카펫, 애니메이터 이용배와 조경학자 성종상이 만든 애니메이션, 식물학자들이 참여한 세밀화 등 다양한 장르를 참여시킴으로써 현대미술에만 매몰되기 쉬운 야외 전시의 진폭을 넓혔다. 예컨대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인 신혜우는 서양의 여러 외래식물이 국내로 반입되던 근대기 대한제국 황실 전속 식물학자를 상상하며 봄부터 덕수궁 내 식물을 채집 조사하고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표본과 세밀화 등으로 풀어낸다. 미술이 어떻게 확장하는가를 보여주는 전시다. 28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