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에게 보물과도 다름없는 오른팔이 갑작스럽게 마비된 후 천직이라 생각했던 조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정관모(84) 성신여대 명예교수(영암교회 은퇴 장로)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조각 대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생애 마지막 전시회를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연다.
전시 개막일인 지난 10일 갤러리에서 만난 정 교수는 퉁퉁 부은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2019년 오른팔에 육종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거쳤지만 결국 팔을 쓸 수 없게 됐다. 주치의는 남은 날이 길어야 1년이라고 내다봤다. 암세포가 전이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진통제도 듣지 않는 통증이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라면 안 가겠다고 버티지 말고, 남은 힘으로 복음을 전하는 작품 제작에 더 힘쓰자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아직 하나님이 데려가시지 않았다”며 웃었다.
정 교수가 투병 생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덕분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그에게 예수님은 삶의 지표이자 ‘기념비’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장, 그리고 수많은 수상 경력을 뒤로하고 그는 2002년부터 기독교 현대미술에 매진했다.
“2002년 대한민국기독교미술상을 받으면서 이 상의 의미를 곱씹어봤습니다. 기독교 미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라는 엄중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 했던 경험과 훈련이 기독 미술을 중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았죠.”
정 교수는 2006년 경기도 양평에 C아트뮤지엄을 세우고 복음을 담은 조각 작품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높이 22m에 달하는 세계 최대 예수 얼굴 조각도 그곳에서 제작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표현했지만,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닌 인자한 표정이라는 점에서 관람객은 작가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정 교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에 체력 소모가 덜한 회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십자가를 뜻하는 여러 상징에 성경 문구를 넣었다. 그는 “조각은 추상적이지만 회화는 직관적이라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관람객이 쉽게 알아챌 수 있다”며 “성경 말씀을 드러내는 것은 전통적 미술 작품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조형 세계를 보여주는 기회”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정 교수가 투병 생활을 시작하던 시점에 그렸던 회화 24점이 걸렸다. 지난해 받은 2차 수술 후에는 회화도 그릴 수 없어 그는 이번이 생애 마지막 전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예술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교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잠재돼 있어야 합니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느낀 것을 삶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하죠. 제 작품이 보는 이들의 영성을 깨우고 그들의 인생을 가다듬게 하길 소망합니다.”
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