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려서는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욕심내지 말라는 교훈이 담긴 전래동화지만, 노동을 전제했다. 소재가 노동을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욕심낼 수도 없는 막막한 현실에 대한 한탄인데, 노동을 배제한다. 근로소득의 시대가 가고 금융소득의 시대가 왔다고 할까.
노동은 악일까 선일까? ‘창세기’는 인간 타락의 관점에서 노동과 고통을 연계 짓는다. 고통스러운 노동이 인간 실존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과 안식의 균형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전반적으로 노동을 긍정한다.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설파했다(요 5:17).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은 토기장이를 연상시키고, 예수도 지상에서 육체노동자인 목수를 직업으로 택했다. 곧 일하는 하나님이다. 이런 모습은 여타 종교나 철학에 나타나는 유휴신(遊休神)과 차이가 난다. 유휴신은 세계로부터 물러나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 관조하는 오불관언의 신이다.
기독교는 교회사를 통해 노동 긍정을 이어갔다. 수도원운동은 노동을 수도 활동으로 간주해 ‘노동이 기도’라고 했고, 종교개혁가 루터는 세속 직업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했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역사적인 워싱턴 행진은 자유만이 아닌 ‘직업과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뿐인가? 힌두교도 간디는 물레질 같은 단순노동을 명상의 반열에 올려놨다. 학승 윤호진 박사도 ‘불교의 노동관’에서 노동은 현세뿐 아니라 내세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노동자 해방을 주장한 카를 마르크스도 노동 자체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신세로부터의 해방을 주창했다.
노동의 긍정은 오늘날 다방면으로 도전받고 있다. 노동의 부정적인 면을 경감하거나 해소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그러나 과연 노동 자체에 대한 거부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돼야 할까. 먼저 무인화(無人化)는 영어로 자동화(automated)나 인간 부재(unmanned)로 표현된다. 무인화는 인간이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분야의 노동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쾌거다. 그러나 무인화가 전반적 무인력화(無人力化·un-man-powered)를 지향한다면 많은 사람에게는 무고용 시대를 연상시키는 위협이요, 따라서 과학의 배반이 된다.
최근 신(新)인간상을 표현하는 ‘○○족’이라는 단어도 폭증하는데, 상당수가 노동 부정을 지향한다. 최신 버전인 ‘파이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은 노동의 최소화와 금융소득의 의존을 노골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현상이 노동의 질을 높이고 그 의미를 회복하는 웰빙으로 나아가면 좋겠지만 행여 노동 자체로부터의 자발적 소외로 귀착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불한당(不汗黨) 시대의 도래인가?
요즘 세태를 보면서 100여년 전 출간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 연상된다. 책의 요지 중 하나는 유한계급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노동 자체에 대한 경멸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인간상에는 이런 움직임이 계급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 유한계급을 넘어 유한개인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신인간상의 이상향(utopia)이 인류 전체를 위한 이상향보다 소수의 ‘행복의 나라(eutopia)’와 다수의 ‘생지옥(dystopia)’이 될 가능성을 확실히 배제할 수 있을까? 현 세상은 아직 3D로 표현되는 고통스러운 노동, 다수 노동자의 곤경과 근로소득 의존, 고용 불안, 비복지(diswelfare)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전통적 인간상과 신인간상의 조화가 요청된다. 이런 바람이 기성세대의 시대착오적 넋두리일까?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