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소리를 듣는 소녀, 어른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입력 2021-11-11 20:47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야. 인간들이 정해둔 규칙을 지키는 거지. 외부인이니까.”

열일곱 소녀 나인에게 이모는 설명한다. 나인은 평범한 여고생이 아니다. 외계에서 도착해 땅에서 태어난, 식물과 대화하는 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어기고 부끄러운 민낯을 숨기기 위해 진실에 눈감는 인간들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모른 채 살아왔다.

어느 날 나인은 나무의 속삭임을 통해 2년 전 벌어진 고교생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지만, 얽히면 피곤해진다. 자신의 특별한 능력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된다. 무엇보다 나무에게서 진술을 들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인이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 된다. 고민하는 나인에게, 나인과 같은 존재인 승택이 말한다.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주인공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낯선 존재이자 사회적으로 작은 목소리를 가진 청소년이다. 나인과 친구들은 아직 사회의 문법에 길들지 않았기에 고통과 거짓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이들은 10대의 눈으로 잘못된 어른들의 세계를 아프게 파고든다. 나인과 친구들이 진실에 다가가고 거짓에 눈먼 어른들을 설득해가는 모습을 그린 ‘나인’은 과학소설이면서 성장소설이다.

지은이 천선란은 소설 ‘천 개의 파랑’으로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했다. ‘천 개의 파랑’에서 휴머노이드를 소재로 낯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 천선란은 이번 작품에서도 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것을,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작은 진실을 외면할 때 누군가의 세상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 그린다.

천선란은 작가의 말에서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며 “그렇게 온전한 어른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 전에, 상처와 슬픔이 무기가 되어 또 다른 출혈을 일으키는 세상으로 향하지 않도록. 그런 마음으로 썼다”고 밝혔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