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선 책을 읽을 때처럼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 이동하지만, 메타버스에선 여행하듯 공간을 순간 이동하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달 29일 크리스 콕스 메타(구 페이스북) 최고제품책임자(CPO)는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메타버스가 가져올 미래를 이렇게 소개했다. 현실에서의 이동 제약을 넘어 서로 다른 공간이 연결되는 일상이 구현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콕스 CPO는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보는 수준을 넘어서 특정 공간에서 직접 움직이며 나의 존재감과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메타버스”라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도 메타버스와 연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메타는 메타버스 체험관을 전 세계에 오픈할 계획까지 세웠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현실 세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의 가상세계를 뜻한다. 가상 현실보다 한 단계 진화한 개념으로 실제 현실처럼 생활할 수 있다. 이 용어는 1992년 미국 SF작가 닐 스티븐슨이 소설에 언급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현실과 가상을 접목시키다 보니 현실 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가상세계에서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뒤따르는 상황이다.
일례로 메타버스 공간에서의 ‘스토킹’을 가정해볼 수 있다. 가상 공간 안에서 초등학생 A양의 아바타를 성인인 B씨 아바타가 졸졸 따라온다. B씨 아바타는 A양 아바타에게 계속 말을 건넨다. A양 아바타가 이를 무시하자 B씨 아바타가 돌연 욕설과 성희롱성 발언을 퍼붓기 시작한다. B씨의 아바타는 심지어 A양 아바타와 의도적으로 신체를 접촉시키기도 했다. 가상 공간에서의 스토킹은 수일간 계속된다.
이 사례처럼 메타버스 안에서 이뤄지는 문제 발언이나 아바타 간 물리적 접촉이 이뤄질 때 현실에서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나아가 이를 처벌할 수 있을까. 메타버스 이용자가 늘면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현행법상 이러한 행위를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메타버스 세상과 실제 세상과의 괴리 속에서 법과 윤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사회적 합의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술에 발맞춘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하는 숙제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실제 메타버스 속에서 벌어지는 범죄 피해를 현실에서 호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지난 3월 영국에서는 아동 성범죄 전과가 있는 20대 남성이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인 로블록스에 접속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 남성은 7~12세 남자 아이들의 아바타에 접근해 성희롱적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에서도 아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제페토(네이버 자회사에서 만든 메타버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상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피해 사례가 있었다. 한 맘카페에는 “남성 이용자가 음성채팅 기능을 이용해 아이에게 욕설과 성희롱 발언을 해 아이의 계정을 탈퇴시켰다”는 글도 올라왔다.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인 예가 고객 정보 문제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앞다퉈 메타버스 내에 가상 스토어를 오픈하고 홍보에 나서고 있다. 상품과 서비스를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형태다. 만약 한 패션 회사가 운영하는 메타버스 입점 스토어에 아바타 소비자가 방문했다면, 해당 업체는 실제 이용자 정보까지 접근할 수 있을까. 아바타가 들여다보는 상품의 정보로 실제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볼 수 있는데 메타버스 세상과 현실 세계를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가능한지 모호하다.
이를 허용한다면 아바타 취향을 기반으로 이용자에 대한 타깃 마케팅을 할 수도 있고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 반면 고객 입장에서는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셈이다.
분명한 규정이 없을 경우 논란의 소지가 크다. 제페토에서 어떤 이용자가 제페토에 등록한 다른 이용자의 휴대전화 번호나 이메일 주소를 파악한 뒤 범죄에 악용했을 때, 당사자의 부주의에서 정보 유출이 이뤄졌는지 메타버스 플랫폼의 관리 부주의 때문인지도 불분명해질 수 있다.
이미 국내외에선 이와 관련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메타버스 서비스 구축에 집중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 메타는 지난 9월 전 세계 학술 기관을 대상으로 메타버스 관련 연구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총 590억원 규모의 연구 펀드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메타 측은 “메타버스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보다 책임 있는 기술에 대한 활동과 연구를 강화하겠다”고 설명했다. 미국 하워드대(사회적 다양성이 IT 기술에 미치는 영향 연구)와 싱가포르 국립대(개인정보보호 및 데이터 사용 분야 연구) 등도 연구 기관에 선정돼 메타버스 구축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국내에선 서울대가 관련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서울대는 메타버스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과 관련한 법과 윤리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메타에서 메타버스 플랫폼 구축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서울대 측에 먼저 연구를 제안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지난 2월 네이버와 ‘AI윤리준칙’을 설계했던 서울대 인공지능 정책 이니셔티브(SAPI) 연구진이 주축이 될 전망이다. 아울러 메타버스 구축에 필요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추가로 섭외돼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에서 관련 연구를 총괄하는 고학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메타버스와 관련된 영역은 이제 첫발을 뗀 수준이라 어떤 이슈가 있는지부터도 정리가 안 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것 중 프라이버시 문제, 윤리적인 문제, 메타버스 안에서의 안전 문제에 대한 고민이 기본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용일 기자 mrmonst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