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 특성화고 서영씨, 몇년을 일해도 알바인생 막막

입력 2021-11-10 00:02

특성화고(직업계고) 학생들은 졸업 전 현장실습을 통해 접하는 첫 일터에서 최저임금을 받는다. 교육부의 ‘2021학년도 직업계고 현장실습 운영 매뉴얼’에 따르면 업체는 최저임금의 70% 수준(올해 기준 시간당 7400원) 이상을 부담하고,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금액은 국고로 보전해준다. 업체가 70% ‘이상’을 부담하게 돼 있지만, 학생들에게 그 이상을 지급하는 업체는 찾기 어렵다.

첫 일터에서 ‘도매금 노동력’ 취급을 당한 특성화고 학생들은 교복을 벗은 뒤에도 비슷한 처우의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입을 모은다. 첫발을 디딘 곳에서 벗어나려 애를 써도 결국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더라는 것이다.

졸업 후 안정적 일자리 꿈꿨지만

서울 노원구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이서영(가명·27)씨는 지난 9월 직장인 경기도 한 물류센터에서 10~15㎏ 정도 되는 물품들을 연달아 옮기다 허리를 다쳤다. 팀원은 4~5명밖에 안 되는데 매일 날라야 하는 물품은 200개에 달했다. 지게차가 옮겨야 할 짐을 급한 대로 작업자들이 옮기다 다친 것이다.

이씨의 학창 시절 꿈은 물류센터 직원이 아니었다. 지체장애를 가진 부모님 대신 어린 나이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는 특성화고 진학을 결정했다. 특성화고에서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고, 원하는 분야의 일자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씨는 의료디자인과 전공을 택했다.

그런데 이씨가 정작 고교 3년간 배운 것은 포토샵 등 기본 디자인 프로그램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기기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병원 코디네이터라는 민간 자격증도 의욕을 갖고 땄다. 하지만 그가 취업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의료기기 업체는 없었다. 해당 과는 사라졌고, 이씨는 취업반 대신 진학반을 택했다.

졸업 후엔 이모의 권유로 1년 동안 공부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지만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는 패밀리 레스토랑 주방 보조, 동물병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다. 그러다 2015년 서울 중랑구에 있는 한 소아청소년과에 처음으로 취업했다. 고졸 학력에 경력이 없던 이씨가 받을 수 있는 돈은 최저임금에 월 10만원의 식비를 얹은 금액이었다. 수습 기간인 3개월 동안은 이마저도 전액 지급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무시와 막말도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7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이씨에게 놓인 선택지는 단기 일자리뿐이었다. 2016년 이씨는 온라인 쇼핑업체 콜센터에 취직했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거는 고객들, 전화로 성희롱을 일삼는 이들에게 1년여간 시달리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얻고 회사를 나왔다.

다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전전하자니 내일이 막막했다. 고교 시절 배운 디자인 분야의 일을 찾아보려 학원을 통해 정부지원 취업성공패키지를 신청했다. 정부가 연결해주는 일자리였는데도 고졸을 뽑는 디자인업체는 없었다. 학원에서 소개해 준 일자리는 콜센터, 보험회사 임시직 뿐이었다. 그렇게 물류센터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씨는 “장애인 부모님과 살면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던 내겐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한 특성화고를 나온 뒤에는 취업도 제대로 못 한 채 암울하게 살고 있다”며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지난해 12월 펴낸 청년노동 보고서에 따르면 특성화고 졸업생은 이씨처럼 여러 일자리를 떠돌았다. 7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졸업 후 이직 경험’을 묻는 말에 응답자의 55%가 1회 이상 이직했다고 답했다. 이직하지 않은 경우는 29%였다. 이직 횟수는 1회 17%, 2회 13%로 나타났고 3회 이상 일자리를 옮겼다고 답한 경우도 25%에 달했다. 그만큼 일자리의 질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꿈 찾아 떠나도 결국 제자리

지난 9월 27일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다 15층 높이에서 추락사한 차모(29)씨는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현실로 돌아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부산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그가 다시 줄 하나에 매달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건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지인 등에 따르면 차씨는 지난해 바로 옆에서 줄을 잡고 일하던 동료 외벽 청소 노동자가 추락해 숨지는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충격과 죄책감에 빠졌던 차씨는 용역 업체 측에 안전 관리 부실을 지적했지만 업체는 무시했고 그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지면서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 차씨는 프리랜서 모델 일 등을 하며 생활했지만 안정적 수입을 얻지는 못했다. 차씨 친구는 국민일보와 만나 “4살짜리 아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가장인 그가 오래 일을 쉴 수 없다고 했다”며 “생계 때문에 위험한 외벽 청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가 발생한 날은 그가 현장으로 돌아간 첫날이었다.

차씨를 고용한 외벽 청소업체는 사고 사흘 전 보조용 구명 밧줄을 구비하라는 한국안전보건공단 권고를 받고도 이를 시정하지 않았다. 차씨는 구명 밧줄 없이 작업용 밧줄 하나에만 의지해 유리창을 닦다 추락했다.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달 20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해당 업체 안전관리팀장 A씨(37)를 불구속 입건했다. 홍성관 특성화고교노조 충남지부 준비위원장은 “특성화고 학생들은 현장 실습부터 낮은 임금에 열악한 근로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안정적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라는 걸 직감한다”며 “전공을 살리기는커녕 계속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구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이형민 신용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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