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풍경화] “잘 지내시죠?”

입력 2021-11-13 04:03

갑자기 이사를 하게 돼 전세대출을 알아보는 중인데 심사를 위해 신용등급을 확인해봤더니 내가 대한민국 상위 6%라는 것이다. 도대체 뭘 했기에 신용이 이리 준수할까 곰곰 생각했더니, 도대체 뭘 한 게 없으니 높은 것 같다. 아무튼, 하다못해 운전면허 필기시험 하나라도 상위권에 들면 기뻐하는 그 마음으로 아내에게 자랑했다. “자기야, 내가 신용 상위 6%래!” 아내가 그런다. “소득이나 상위 6%에 들어 보시지 그래?” 역시 아내는 촌철살인의 달인이시다. 날마다 나를 죽인다.

엊그제는 편의점에 있는데 이름 없는 전화가 왔다. 발신지가 ‘일본’이다. 내 팔자에 일본에서 전화 올 일은 없으니 ‘또 검찰청 지능범죄팀이겠군’ ‘아니 이번에는 CIA 일본지국이려나’ 하고 받지 않았는데 잠깐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전화 올 곳이 있는 것이다!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는 말이 없다. 역시 피싱이로군, 하고 웃는 순간 건너편에서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과 일본 편의점을 비교하는 에세이를 쓰겠다고 몇 차례 일본을 오간 적이 있다. 그때 도움을 주셨던 일본 편의점 점주님인데 전화를 주신 것이다. 국적은 한국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편의점을 운영하신다. “웬 전화를?” “요새 인스타그램에 보니 봉 작가가 영 힘이 없어 보여서요. 힘내세요!” 아, 이런 감동이라니…. 내가 소득으로는 상위 6%에 들지 못하지만, 평생 그럴 날이 오지도 않겠지만, 사람 사귀는 복(福) 하나는 1% 안에 드는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엔 핼러윈이었다. 매년 그날 우리 편의점엔 스파이더맨도 오고, 겨울왕국 엘사도 오고, 아이언맨, 드라큘라, 마법사, 온갖 동화 속 인물들이 고루고루 왕림하시는데, 날이 어둑해지자 고깔모자 쓰고 드레스 차려입은 마녀가 빗자루 타고 날아와 계산대 앞에 섰다. 사탕을 건넬 시간이로구나! 준비한 사탕이 어딨더라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마녀가 막대사탕 하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훌쩍 떠난다. ‘하윤아, 아니 마녀님! 오늘은 당신이 제게 사탕을 주는 날이 아니라 제가 당신에게 주는 날이랍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봤더니 마녀가 그런다. “사탕 먹고 꼭 치카치카하세요.”

때로는 갑작스러운 집주인의 전화에 놀라고, 때로는 갈수록 떨어지는 매출에 낙담하며 우울하지만, 때로 ‘뼈 때리는’ 아내의 농담에 능글맞게 웃고, 때로 먼 곳에서 걸려온 뜬금없는 안부 전화 한 통에 눈물 글썽이며, 그리고 때로 꼬마 마녀가 건네준 번지수 틀린 사탕 하나 입에 물고 힘을 얻는다.

나는 상위 몇 %에 들어갈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각자 수십만 분의 1의 경쟁을 뚫고 세상에 태어난 생명 아니던가. 이 기나긴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결국 우리는 또 한번 선택받은, 기막힌 생명력의 소유자들이다. SNS 메신저에 있는 친구들 목록을 훑는다. 내가 전화하고 사탕을 건네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되돌아본다. 오늘 나도 누군가에게 전화해 “잘 지내시죠?” 하고 물어야겠다. 아참, 그리고 명심할 것! 사탕 먹고 ‘치카치카’는 꼭 하자.

봉달호 작가·편의점주